남편도 노라고 말할 수 있다.
낯선 사람들이 핑크 빛 인연을 엮어 사랑을 만든다.
그리고 서로 반쪽을 찾은 의미로 결혼을 선택하고 가정을 꾸린다.
‘자기야’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꿀과 젖이 흐르는 가나안이라 여기며 행복 깨소금을 만들기에 급급하다. 늘 잉꼬부부처럼 알콩달콩 행진이 계속 되기를 바라지만 삶이란 바라는 데로 되던가! 한창 서로에게 몰입하던 연애시절,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줄 것 같은 자세와 감동도 얼마 후 유효기간 지난 빵처럼 폐기처분해야 할 것을. 어느 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결혼의 환상에 빨리 종지부를 찍는 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처세술임을 알게 된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그러리라 믿었던 생활도 갈수록 생뚱맞게 전개되면 회의감이 든다, 가끔 결혼선택에 신중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급기야 이혼이란 또 다른 선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 옛날 열렬한 애정과 관심을 기울인 반쪽은 어느 날 빛바랜 누런 책처럼 퇴색한 낯선 타인이 되고 아니 남보다 더 먼 사람이 되어 각각의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벌써 결혼 생활이 십년이 지났나.......속도감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지나간 결혼 연륜이 강산을 바꾸고도 남았다. 벌써 .......
내게 모처럼 던진 남편의 ‘노(no)' 라는 대답에 낯선 타인을 대하듯 물끄러미 그 낯설음에 당황한 일이 생겼다. 이제껏 살며 자신이 감당하기 벅찬 것에도 ’힘들다‘ 의사표현을 아끼던 남편이였다. 그랬기에 부정적 ’노‘가 던져주는 파문은 나를 위해 헌신하는 내 사람이 아닌 타인관점으로 그를 보게 했다, 남편도 당당하게 ’안돼‘ 라는 의견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느닷없이 지역 방송국으로부터 출연섭외를 받았다, 단란한 가정을 선정해 가족애와 부부사랑을 다루는 프로였고 또 그런 성격에 우리가정이 선정됨에 오히려 흐뭇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방송출연을 수락했다.
사전에 인터뷰와 퀴즈 문제를 만들기 위해 담당PD와 구성작가가 내 집을 방문했다, 가족 오락관처럼 스피드게임도 하고 가족간에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개인 면담을 통해 관심사를 캐내고자 온 것이다. 아울려 남편과의 연애 에피소드도 그 당시의 만났던 장소를 찾아 산책하며 어설픈 연기도 삽입한다는 것이다. 아이들도 TV에 자기 얼굴이 나온다고 탄성을 지르는 걸 보아 그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결혼생활 10년 넘어 느닷없이 가족시네마를 연출할 기회가 주어지니 색다른 추억페이지라고 흥분되었다. 아이들도 며칠 남았느냐고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 소풍날처럼 나도, 아이도 촬영 날을 기다렸다.
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오후에 생긴 이벤트를 졸졸 시냇물처럼 읖었다. 그리고 이틀 후 녹화를 위해 시간을 비워놓아라고 했다.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리라는 내 예상을 뒤엎고 출연하지 않겠다고 자기를 제외한 나와 아이만 출연하라는 것이다. 아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끼리 잔치를 할수 있으며 또 프로 성격상 그건 용납이 안될 일이다. 쑥스러워서 일까? 아님 무슨 일이 생겨서일까? 이해되지 않는 남편 태도를 즉시 어찌해 보겠다는 발상을 접고 아침을 맞았다.
하지만 아침에도 내 설득에도 요지부동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밤사이 마음의 변화를 기대하며 다음날 자연스레 녹화에 응해줄 것을 그는 진지하게 배반했다.
“이제까지 당신 청을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지만 이번은 이해해 달라”
하지만 모든 스캐쥴을 다 잡아놓은 상태고, 오늘 야외녹화에 모레는 방송인데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갑자기 펑크를 내면 내 체면과 아이들 실망은 어떻게 되나. 머릿속은 알량한 내 입장을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복잡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거듭 이해할 수 없으니 남편이 다시 생각을 고쳐달라고 평소보다 몇배의 목소리를 깔며 역설했다,
완강히 매스컴 기피의 거부몸짓을 고수하는 남편을 결국 어쩌지 못하고 방송 출연을 포기해버렸다. 즉시 담당피디에게 사실을 알려야했다.
갑자기 서울 출장 갈일이 생겨 녹화할 짬이 없다고 펑크사유를 대었다. 예측 못한 통고에 당황함을 묻혀 “그럼 시간을 연기하면 어때요?”
말소리에 힘이 빠진 나는 궁색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목소리가 더 낮아지고 있었다,
“며칠 걸린다고 하니 아무래도 다른 가족을 선정하셔야 겠어요”
시기가 적절치 않다는 소리로 내 가짢은 자존심을 세워보려 했지만 거짓말도 해본 사람이 매끄럽게 하는지, 내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담당자는 남편과 통화를 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알려주었는데 역시나 피디의 설득에도 남편은 자기를 빼고 가족끼리 촬영하라고 했단다. 가족프로인데 그게 말이 되냐?
어쩜 저렇게 말 할수 있을까! 끝끝내 남편의 촬영거부를 이해하기 보담 ‘왜’‘왜’ 왜 그럴까 하는 서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좁은 내 속내가 자꾸 꼬여들기 시작하면서 예전 무리한 요구도 해결해주려던 내 남편이 맞나 의심까지 들었던 것이다.
몇해 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파트에 넋이 나간 적이 있었다,
아파트는 적지 않는 돈을 투자해 구조변경을 해놓았고 11층 베란다에서 본 바깥은 거의 그림이었다. 아이방도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무엇보다 한 벽을 통유리로 변경한 서재는 내 눈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서재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면 그곳이 바로 낙원이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낙원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몽환적 환상에 사로잡힌 나는 급기야 남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되었고, 아내의 간절함이 어떤지 아는 남편은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주인을 만나 가격흥정을 하고 드디어 계약만 남았다. 사실 47평 아파트에 적지 않는 돈이 필요했다.
그 당시 돈이 비축되어 있지 않는 상태라 구입하기 위해서는 빌려야 될 형편이었다, 명색이 억 단위의 돈을 변통하기란 어디 쉬운가!
동분서주하는 남편을 보니 날이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작으나마 도심지에 내 아파트도 있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2층 주택도 갖고 있기에 경치좋은 아파트 구입은 솔직히 사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내가 갖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리를 감수한 남편행동에 난 감동을 먹었고, 그 마음만으로 소유한 것과 진배없어 내가 포기를 제의했다.
“이 다음 더 멋진 아파트가 나올거야, 지금 시기상조인 것 같다”
나의 이 한마디에 애가 타던 남편 얼굴에 그늘이 걷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여보”
정작 고마워할 사람은 나였지만 구입 포기해준 나를 더 고마워했다.
지금도 잠시 내 영혼을 마비시킨 그 아파트를 지나치다보면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의미있는 웃음으로 그때를 회상하고 한다.
이런 쉽지 않던 요구도 들어주려던 남편이 사소한 방송출연에 단호함을 보임에 그 동안 미처 몰랐던 남편의 색과 개성을 다시 점검하게 한다, 우리의 갈등은 대체적으로 복잡한 것이 아닌 사소한 것에서 일어나듯 능히 무리없이 호응하리라 여긴 출연 건에 어긋남을 맛보니 역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칼슨 책이 왜 잘 팔리는지 이해된다.
내가 하기 싫은 것, 원하지 않는 것에 거부의 몸짓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남편이 내키지 않아 NO 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서운하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살면서 충분히 있을수 있는 경우임에도 내게는 당황으로 여겨지니 그 동안 내 기분을 맟춘다고 남편이 스트레스 받았으리라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남편의 ‘노‘는 당분간 수용하기까지엔 다소 시간이 필요하고, 아마 오래동안 숙제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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