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나를 위한 식사

와인매니아1 2007. 5. 30. 14:51

    나를 위한 식사 
 

                             
    가만 보면 나만을 위한 식사에 참 소홀한 것 같다.
    무엇보다 자신을 소중히 대접해야 남으로부터 대접받는다고 알고 있는
    나로서 점심식사는 약속이 없는 한 여지없이 소홀하게 대한다. 무의식에
    가까운 습관은 고독한 시간에 벗해주는 커피나 빵 조각으로 대신했다.
    내 삶의 동반자처럼 따르는 블랙커피를 수시로 마셔대는 통에 갈증과
    접대 뿐 아니라 이제는 식사대용까지 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덤덤한 일상사에 자기만을 위한 식사에 정성을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
    미리 선약이 있지 않는 한 나 혼자 갖가지 찬을 마련한 식사는 꿈꾸지
    않는다. 학교에서 급식(給食)하는 아이는 더 이상 어미 손길이 필요 없고
    아내 솜씨를 익히 아는 남편도 된장 내음 풍기는 식탁은 꿈에서 동경할
    뿐 현실에서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형편과 내 게으름이 맞물려 제대로
    갖춘 밥상은 그림의 떡이다.
   
    분주함과 노동의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날은 당연 배고픔이 뒤따르지만,
    이도 저도 아닌 미끄러운 일상엔 별달리 변화가 없다. 단지 무언가 허전
    할 뿐이다. 이제껏 그런 나날의 연속인데 느닷없이 남편이 방문했다.
    내 업무와 가정이 동일선 상에 놓여있는 탓에 남편은 낮 방문은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기에 남편의 방문는 의아했다. 이틀 전 잠을 잘못
    잤다고, 어깨와 목이 뻣뻣하다고 했다. 뜨거운 곳에서 찜질하면 나을까
    싶어 사우나를 다녀왔지만, 여전히 불편해 집에서 더운 찜질을 해 볼
    요량으로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 출근 때 남편이 내게 했던 말이 언 듯 스친다. 영화에
    서나 봄직한 장면을 연출한 거다. 내가 겉옷을 들고 남편에게 입혀 주는
    장면을 모처럼 흉내내었다. 이 행위에 감동했는지 무심코 던진 말.
    "내가 아파야 대접받는 모양이다" 자주 아파야겠다고 아이처럼 챙겨주는
    것이 못내 신기한지 대낮에 찜질을 빙자해 내게 어리광을 부리려했다.
   
    여러 차례 더운찜질을 끝내고 보니 점심시간이 걸렸다. 능히 시켜먹어도
    되었지만 모처럼 상을 보기로 했다. 토스트, 쥬스로 아침을 대신하기에
    남편과 밥상 마주하기란 저녁과 주말이 외엔 드물다. 마침 재려놓은 갈
    비가 있어 이것저것 남편 좋아하는 밥상이 어렵지 않았다. 오붓한 둘
    만의 식사가 나쁘지 않지만 조용히 지낸 지난 시간과 달리 분주하다.
   
    근사한 갈비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을 마주했다.
    사실 배고픔도 식욕도 없어 건너 띄고 싶다. 하지만 '함께' 에 의미
    붙여 군침 흘리는 연기를 해 본다. 찜질로 부드러워진 근육 탓인지
    식욕이 감돈 남편은 입맛 다시며 여유를 부린다.
    "중년엔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골다공증이 예방된다고 하네"
    마치 안 먹는 아이 골려 먹이듯 내 밥그릇에 갈비를 억지로 얹어준다.
    알아서 먹겠다고 사양하는 나를 끝까지 먹이겠다는 남편 마음씀이 싫지
    않다. 사실 많이 먹어봐야 반갑찮은 비만밖에 더 올까. 비록 하찮은 것
    일 망정 함께 나누고 챙겨주는 제스처가 음미하는 미각보다 더 달콤하
    고 포만감을 몰고 왔다.
   
    평소 남편은 우리 집 홍일점이란 명분으로 내게 대한 대접이 만만찮다.
    게을러 잘 먹으려 않은 내 점심을 챙기기 위해 맛난 별미집으로 나를
    데려가는 성의를 보이곤 했다. 영양식을 먹자는 남편은 정작 점심 흉내
    만 내는 내 몫까지 하얗게, 몇 끼 굶은 사람처럼 혼자서 빈 접시 비운다.
    그럼에도 그 제의가 고맙기 그지없다. 가끔 식사하러 가자는 전화에 장
    난끼가 발동한 나는 예전 잘 나가던 시절의 너즈레를 짐짓 부린다.
    "나랑 식사하려면 좀 비싼데, 괜찮아" 하면서 제법 처녀 몸값처럼 값을
    부풀려 보지만 남편은 안다. 금방 헤헤 웃으며 나와 준다는 것을......
   
     가정에서 예상치 못한 점심을 하고 나니 갑자기 살이 불은 사람처럼
    옷이 몸에 꽉 낀다. 사람들이 양껏 먹고 난 후 허리띠를 풀 지경이라고
    엄살 부리면 엄청 미련곰탱이라 흉 본 나였다. 도대체 왜 저리 절제를
    못할까, 숨차 씩씩대는 꼴이라니 하며 원시인처럼 측은하게 보았었다.
    평소 남편이 그런 몰골을 보여주는 편이라 나는 절대 그러지 말자고
    다짐도 했다. 근데 그 미련곰탱이 흉내를 내가 낼 줄은 미처 몰랐다.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새끼가 날름날름 받아먹듯 남편이 밥 위에
    올려 준 고기를 덥석 먹었더니, 예전 내가 흉본 언어가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다이어트의 원칙 중 음식 욕심내지 말자를 철칙으로
    여긴 내 행동으로는 참으로 오랜만의 포식이었다.
   
    포식 덕에 찐 살을 복귀하자면 그만큼 땀과 노력이 소요되겠지만,
    모처럼 속닥하게 누린 식사에 후회는 없다. 언제나 가족을 위한 식탁
    준비에 분주한 대부분 주부에게 나의 행동이 낯설게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끼 때 마다 '먹어라 전쟁' 으로 아이와 신경전을 치른 나로서는
    실로 여유있고 맛깔 난 식사시간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남편을 위한
    상차림이 오히려 나를 위한 식탁이 되어 근사한 음식점 이상의 무드를
    공유하기까지 했으니까......
   
    세월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나만을 위한 식사에 소홀하지 말아야겠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성(母性)의 숭고한 사랑으로, 무한히 제공되는
    무보수의 가사노동에 젖어 아내와 어미는 분명 존재했었다. 그런 삶 가운
    데 진정 '나' 하나만을 챙기기엔 특히 먹거리에 그리 열성을 보이지 않았
    던 것 같다. 진정 내 자신을 사랑해야 타인에게 여분의 사랑을 베풀 수
    있기에 무엇보다 자신에게 정성 들이는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