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못 말리는 웃음
와인매니아1
2002. 2. 22. 10:36
그럴싸한 구실이 있던 없던 하루에 한번 크게 웃어 볼 일이다.
화를 낼 때마다 사람은 그 만큼 늙고 병들지만 방긋 웃을 때는 한층
젊어진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 않던가! 실제 찡그리는 데는 72개의
근육이 필요하지만 웃는 데는 14개의 근육만 있으면 된다 했다. 그
만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 바로 웃음이 아닐
까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웃음이 더 많은 편이다.
남들은 별로 웃지 않을 꺼리 일지라도 난 나사 풀린 사람처럼 실실대며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며 마구 웃어댄다. 웃음 앞에 체면이고 교양이고
물불 가리지 않고 폭소 터뜨리는 나를 의아해 여기는 이도 적지 않으니
진정 내가 웃음이 헤픈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성향을 아는 남편은 모임
가지 전에 '적당히 웃으라' 이렇게 제자에게 훈시하듯 주의를 주곤한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나오는 웃음이 주의를 겁내겠는가?
TV하고 담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지만 요즘은 아이들 덕분에
가끔 시트콤을 본다. 인물설정도 나와 거리 먼 대학생과 미혼 교수가
꾸미는 해프닝이지만 어째 그 극을 볼라치면 아이보다 내가 더 웃고
떠들어댄다. 숫제 누가 아이고 어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시트콤자체가 주는 가벼움과 풍자 때문에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소화
할 수 있는 성질이기에 더욱 어린이나 어른이나 즐겨보지 않을까 싶다.
TV 앞에 2시간자리 지키는 아이가 얄미워 어느 날은 'TV금지' 엄명을
선포하며, 마치 황제 네로부인처럼 권세를 부린 날이 있었다. 투덜투덜
볼멘소리 내지르며 온갖 인상 구겨대는 아이는 일정 시간 지나면 묘한
웃음 지으며 정보를 흘린다. 곧 엄마 좋아하는 시트콤이 시작된다고....
어쩌다 가끔 즐기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아이는 나를 생각하는 척
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보고 싶은 마음을 은근슬쩍 그렇게 둘러댄다.
그러면 어설픈 어미는 짐짓 인심 쓰는 척 폼 내면서 정작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다. "그럼 그 프로만 보고 각자 할 일 하도록 하자"
그래서 꼬이고 구겨진 내 심사를 풀며 접어둔 웃음보를 터뜨리곤 한다.
부전자전이라고 큰 아이는 점잖은 아빠를 닮아서인지 웃음보다 담담한
표정을 짓는다. 미소짓는 얼굴이 훨씬 보기 좋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려운 무표정 연기연출이 의젓하다고 착각하는지 감정 표현에 인색하다.
반면 거울 보며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막내는 코믹 웃음 지은 얼굴로
갖은 아양과 애교를 보이며 인간적인 다양한 표정을 잘도 지어낸다.
어째서 한 뱃속에서 나온 두 아이의 성향이 이리 다른지 불가사이하다.
허긴 어둠에 익어버린 눈처럼 고통과 무덤덤에 익숙한 시댁들 개성이
제 각각이듯 서로 닮지 않는 것이 자연의 이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요사이 여럿 모인 자리, 행사든 박수 칠 꺼리에 지독히 인색한 사람이
더러 있다. 심지어 연사가 박수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야만 마지못해 박수
치는 해프닝도 있는 실정이니,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궁한 탓인지 박수
치는 즐거움을 잊고 지내는 것만 같다. 좋은 일에 축하하고 힘든 노고에
격려 보내는 일이 많으면 좋으련만 자꾸 인색해진 요즘이 안타깝다.
세상은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제로섬게임이라 하듯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이고, 남의 기쁨과 웃음이
결국 나의 즐거움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탓이 아닐까 싶다. 너도나도
어쩔 수 없이 이런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기에 웃음
자아내는 TV 시트콤같은 프로에 우린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런 매체에 의존하지 않는 나로선 편안한 웃음을 제공받는 것에 어느
날 대중의 친구인 tv가 고맙기도 하다.
얼마 전에 큰 아이가 응모한 물사랑 백일장에 장려상이란 명분을 달고
학교로 상장이 전달되었다. 아주 거창한 상장 표지를 떠나 분명 학우들이
함께 축하해주어야 할 일임에도 아이만 불러 상장을 건네주었다 한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말을 빌지 않아도
이런 현실에서 아이들이 타인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기뻐하는 웃음이
생성 될 수 있을까? 좀 체 드리워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교육현장 전부 그렇진 않겠지만, 아직
도 이런 교육현실이 있음에 가슴 아프기만 하다.
기쁨이 있는 곳에 사람과 사람사이의 결합이 이뤄지고, 그 결합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고 유명한 이가 말했다. 어려서부터 기쁨과 웃음에
인색하면 성인이 된 후에도 남에 대한 격려와 배려는 어렵다고 했다.
웃음꺼리에 점잖게 구는 것보다 마음껏 웃고(난 미소보다 소음에 가까운
웃음을 연출하지만) 축하할 일에 진심으로 축하 미소를 보내면 자신뿐
아니라 상대 역시 가슴에 닿는 흐뭇함을 만끽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동안 들리지 않은 동호회에 흔적을 남겼더니만 언제 나의 거침없는
웃음 보기를 원하는 말에 나도 몰래 폭소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늘처럼 노란 개나리 같은 투명한 햇살이 살살 간질 일때면 이유없이
반짝반짝 웃음이 나온다. 이것도 새 봄을 타는 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