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말로 베푸는 보시
와인매니아1
2002. 5. 18. 16:39
12월 크리스마스가 기독교만의 축제가 아니듯, 4월 초파일 역시
종교를 떠나 일반인들이 쉽게 사찰을 찾는 날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밤낮없이 켜놓은 형광등 불빛 아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지낸 현대
인에게 탁탁 울리는 목탁과 불경소리는 잠시지만 평온함을 몰고온다.
이 따끔 산만하게 흩어진 마음과 쓸쓸한 외로움이 허공에 매달릴 때면
어느 암자나 한번 기웃거려볼까 하는 무의식의 충동질이 생기곤 한다.
도심과 떨어져 있는 분위기 탓도 있지만 왠지 푸른 초목이 우거진 자연과
미물들이 들려주는 노래, 바람의 숨결이 내 앞에서 일렁이는 소리 또
경건한 불상을 마주하면 절로 마음이 비워지는 착각이 들어서 일게다.
고요한 정적 앞에서 순해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그럼에도 우린
꾸임없는 자연과 쉽게 일치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아마 자연을 이해의
대상이 아닌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익숙해진 탓일게다.
부처님 오시는 날을 맞아 자연을 벗삼고, 부드럽게 내려보는 그의 자비를
구할 겸 가까운 사찰을 찾았다. 아니 솔직히 덧붙이면 절에서 제공하는
절밥이 그리워 구차한 변명을 대는 건지도 모른다. 가기 싫다는 악동들을
협박하고 갖은 번거러움을 감수하며 이 날은 꼭 들려야 되는 의무감이 내
안에 새록새록 숨쉬고 있었다. 그 흔한 등하나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평소 자비(?)에 인색한 아이에게 뭔가 영양가 있는 볼거리도 제공하고
한끼 맛깔스런 식사 해결 할 속셈을 아이는 일언지하에 짤라버린다.
"엄마, 나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둬"
언제나 따라 가겠다면 떼어놓고 싶은 아이들이건만 가지않겠다고 하면
기쓰고 데리고 가고 싶은 내 청개구리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 또한 나 홀로 실루엣보담 양옆에 아이를 거느리는 모양새가 훨 보기
좋을 거라는 유치한 이기심이 한자리 차지한 탓이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제법 큰 사찰을 찾아 갔다, 근처부터 차의 교행과
주차전쟁이 치열하다 보니 꽤나 많은 인파가 예상되었다. 색색의 연등이
따뜻한 햇살 위에 신나게 춤추며 방문객을 맞았고, 불경소리, 향내음이
곳곳에 나와 화려한 연등물결 만큼 우리 오감을 자극시켜 준 사찰이다.
느지막히 방문한 터라 어느 정도 한산하지 않을까 예상과는 달리 절에
머무는 내내 인파물결은 줄어들 줄 몰랐다.
오늘만은 무엇이든 염원 담아 간절히 기원하면 부처님이 들어주실거라
믿는 건지 곳곳마다 정성스레 합장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얼마나 닦고 손질했는지 불상을 모신 법당바닥은 자칫 덤벙대는 내가
미끄러지면 어쩌나 조심스러울 정도다. 진지하게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타인들의 모습에 감화되어 나 역시 다소곳이 절을 올리게 된다.
아이에게 현장체험 운운하며 절을 찾는 당위성을 대었던 어미로서 뭔가
모범을 보여야 될 성 싶었다.
아이는 향불 피우며 절을 올리는 다른 이가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미가 절 올리며 어떤 바램을 구하는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할수없이 약소한 시주를 너희 손수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 질수도 있다는
허위의 대사로 아이에게 진지함을 요구했지만 아이는 뎅랑 시주만 하고
오히려 주어온 돌로 법당에서 공기놀이를 해댄다. 으이그~~~저 웬수들...
자비를, 내 안에 자비를 듬뿍 주소서 연실 주문해본다. 넉넉지 않게 시주
한 사람이 원래 뭔가 주문이 많듯 나 역시 엄숙해야 하는 곳에서 해괴한
꼴을 연출하는 철없는 웬수를 어떡하던 미워하려는 마음을 거두어 달라고
간곡히 주문을 외웠다. 지성이면 감천인데 내 지성이 절실하지 않은 건지
절에 머무는 동안 내 신경을 극대화시킨 아이에게 관대해 질수 없었다.
그것보면 열심히 간구한다고 즉석에서 효과 드러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 분은 손바닥이 닮아질 만큼 비벼대며 읊어대는 외침은 단편적인 내
바램과는 달리 내 가족의 건강과 평온한 나날을 기원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다른 이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데 비해, 난 아이의 눈높이를 이해못해
볼썽사나운 얼굴에 비좁은 심사만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는 꼴이였으니...
"남이 보면 뭐라고 하겠니?" 가만보면 늘 남의 평가에 연연한 내 모습이
실로 부끄럽기만 했다. 그 나이의 아이답게 구는 행동을 그들의 수준이라
생각하기 보담 늘 내 잣대로 점잖음을 강요하고 그에 미치지 못할 때면
감정의 노예가 되어 아이를 윽박지르고 남의 이목에 겉치레만 중시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유치했었나. 진정 먼 곳에 계신 부처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보다 가까운 내 아이에게 자비를 구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돈을 들이지 않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 7가지
布施(보시) 라는 것이 있다. 그 중에 언시(言施)란 것이 있는데 이는
말로써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물질로 베풀어야 겠다는 관념보다
자상하고 온화한 표정의 말로써 무엇가 보인다면 그 또한 자비가 아닐까?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지금 아닌 '다음' 라고 급하지 않다는 구실로
시간 갖고 차분히 대화하거나, 알기쉽게 설명하기 보담 쉽게 지불하는
것으로 어줍잖은 자비(?)를 대신한 느낌이 참 많이 든다.
내 안에 엿물처럼 엉겨붙은 욕심들이 줄어들기를 간구해본다. 모든 것에
얼룩덜룩 욕심이 일으킨 편린들로 마음이 심란할 때가 많다. 아이 삶에
참견하려는 내 욕심의 일부분이 거두어지면 아이에 대한 스트레스도 한층
옅어지리라. 조금전까지 아이에게 품었던 곱상치 않던 시선을 거두고, 나로
하여금 원한(?)에 사무치도록 만든 작태까지 말간 햇살에 말리고 싶다.
오늘 만이라도 부처님 가르침의 일부분이 내 안에 이쁘게 자리잡혀
순화된 말과 온화한 표정이 유효해졌음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래본다.
I'm Your Man - Leonard Coh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