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건망증 2

와인매니아1 2002. 7. 10. 00:37


삶과 문화의 질이 높아짐에 따라 여러 변화가 양산되고 있다.
문명 이기의 난립, 먹기 위한 생존의 방식들, 휴식과 화려의
인테리어 등 극도의 호사와 그 발전의 속도감에 놀라기도 한다.
특히 기본 의식주 중에서 나름대로 발전 과정이 찬란하지만
그 중 식생활의 두드러진 양상은 과히 괄목하다고 여긴다.

제조업을 하는 남편의 사업관계로 사람과의 만남이 다양하다.
다양한 만큼 밖에서의 식사도 많이 가지는 편인데, 가끔 맛본
음식이 입에 맞거나 별미라 느끼게 되면 감탄한 나머지, 아내
와 함께 그 맛을 즐기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우리
가족을 이끌고 그 음식점을 찾아 나선다.
남편의 이런 마음씀과 배려에 사실 흐뭇함을 가지는데, 그
고마움을 집에서 표현하고자 먹어 본 음식을 흉내 내려치면,
그건 절대로 사양한다.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읉는다는 속담을
인용하지 않을지래도 삼일도 투자하지 않는 아내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게 남편 사양의 변이다.

맛있게 먹은 음식을 집에서 실습도 하고 시도해야 음식에 자신
이 생기지 않는가 말이다. 나의 수고와 번거로움을 들고자 위하
는 척하지만, 이건 순전히 시행착오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계
산이 짙게 깔려 있는 말이다. 사실 요리하는데 자신은 없다.
하지만 모처럼 내 안에서 들끓고 있는 모험심을 잠재우기란 쉽
지 않다. 기실 한석봉도 태어날 때부터 명필가가 아니요, 무수히
연습과 노력으로 달필이 되었듯 처음부터 요리 잘 하는 사람 있
으면 나와 보라지....??

일전에 다녀온 별미 식당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언급해야겠다.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면 나대로 열심히 관찰하면서 재료가 뭐가
들어가 있는지 조금 관심 있게 챙겨본다. 호기심의 일환이지만.
때론 너무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물어보기도 하고
넉살좋게 한 접시 더 부탁하면 군말은커녕 함박웃음 짓은 그 주
인은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기분좋게 후한 말인심을 서비스해
준다. 나름대로 인상적인 맛을 흉내를 내 보고자 집에서 시도하
면 전혀 그 맛과 거리가 먼 이상야릇한 맛이 날 때가 있다.
눈으로 열심히 관찰했음에도 실제는 늘 다르다,,,,황당!


사실 자신있게 시작한 요리가 후에 황당하게 되면 이런걸 괜
히 했다고 후회한 적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난 언제나 숙달된
경험자처럼 눈으로 대충 가름하면서 요리작품(?)을 하곤 한다.
도저히 내 입맛으로 그 맛이 아니라고 판단이 될 때면 비상용
의 라면스프까지 동원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애매한 참기름을
넣어 진짜로 남편 말대로 국적불명의 요리로 사람을 잡는다.
그 소리를 듣고야 비로소 요리에 대한 자신감이 자동점화 된다.
( 한동안은 집에 평온감이 찾아 온다...자신감 상실로!)

포항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관계로 구석구석 횟집과 매운탕,
해물탕 이런 탕류 들이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술을 마시
지 않지만 얼큰한 걸 좋아하는 남편은 종종 해물탕을 먹으러
해물탕 전문집을 애용한다. 그 반면 얼큰한 건도 질색이고 또
해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제대로 이용해 보질 않았다.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멋진 집에서 이색적인걸 먹어보자며 살
살 꼬시는데 정작 가보니 해물탕 집이었다. 평소 장만하는 것도
싫어하고 또 해물 요리는 한번도 시도하지 못했기에 그 날 음식
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푸짐한 해물탕이 가스렌지에서 보글보글 끓고 여러가지 해물이
나를 쳐다보고 '나 맛있겠지' 이렇게 말하는데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정겨웠다. 일정하게 끓인 후 본격적으로 먹을 순서에 한
입, 두입 진짜 화끈하게 매워서 조금전의 정겨운 광경은 간 곳
없고 좀체 먹지 않는 검은 콜라만 축내고 있었다. 혹 내가 제
못 먹을세라 살점을 발라주는 남편이 미안해 여길까봐 맛없다
소리도 못한다. 왜냐면 다음부터 안 데리고 올 것이 뻔하니까.
다행히 남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흥분
한 나머지 맵지만 호호 하면서 잘도 먹어주었다.

'역시 난 음식을 즐기기만 해야지 먹는데 의미를 두면 안 돼'.
이렇게 마음을 다스렸더니만 기분이 호전된다. 그래도 모처럼
먹은 음식에 속이 놀랐던지 나올 때까지 입안이 얼얼했다.
게산을 끝내고 난 후 밖의 경관이 괜찮아 구경하고 있는데, 누
가 불렀다, 나를 부르는 줄 모르고 차에 타려고 하니 주인이
황급히 나에게 오는 것이다. 세상에나........핸드백을 두고 온
것이다. 그 안에 각종카드며 현금, 휴대폰, 신분증까지.....
"당신은 못 말린다"면서 남편은 공손하게 주인에게 답례하고
처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여보, 믿음직한 남자들을 대동하니 내가 공주로 착각했나봐.
그러니 밖에서 아내로 생각말고 늘 공주로 대접 해줘"
미안한 마음에 얼렁뚱당 궤변을 주섬주섬 나열하며 콧노래를
했다. 남편의 어이없음을 뒤로 한 채 아이들에게 해물탕이
너무 좋다고 과잉제스처를 떨며 먼 산을 바라본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의 건망증이 왜 자꾸 나를 유혹하는지
당최 모르겠다. 이 자연의 푸르럼과 코발트의 청명한 하늘이
내 정신을 교란시키는지 아님 놀란 나의 위장(胃腸)이
유혹 한 건가!
그래, 내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매사 실수 안하고 살수 있으
랴! 이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쏟아내지만 문제는 남들보다 도가
지나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