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꽁보리밥
와인매니아1
2002. 10. 25. 16:30
아련한 그리움 속에 추억하나를 그려본다. 예전 초등학교 시절,
그 시절 정부 시책에 따라 혼식을 권장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 점검을 통해 잡곡과 보리를 어느 만큼 섞였는지
일일이 검사를 했다. 흰쌀보다 누른 보리밥이 압도적인 도시락이 대다
수였는데, 그 당시 친구들은 그 보리밥을 참으로 싫어했다. 늘 먹는
밥이기에 더욱 거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빈곤을 모르던 나는 매일같이 하얀 쌀밥을 싸 다니곤 했다.
혼식검사를 한다고 하면 다른 친구의 보리쌀을 몇 개 집어 내 밥 위
에 눈가리개용으로 살짝 얹기도 했던 그런 철없는 기억도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국민건강을 위해서라 기보다 현실적으로 쌀이 모자
라기에 혼식의 명분을 앞세우며 권장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몇 해 전, 우리 앞에 등장해 현미의 유익함을 강조한 이상구 박사의
강연에 자극 받은 주부들이 많았다. 별로 찾지 않던 현미가 한동안
유행병처럼 히트 한 적이 있었다. 유명인이 어디에 뭐가 좋다고 한마
디라도 할라치면, 그 상품은 날개를 단다. 새삼 매스미디어의 위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사례들은 종종 목격된다. 비타민c 역시 몸
에 좋다고 말한 순간, 호떡집에 불나듯 약국마다 매진공고를 내 걸어
야했다. 마찬가지로 현미의 유익함이 전파를 탄 순간 집집마다 현미밥
이 주름을 잡은 것은 지극히 정상인지도 모른다. 어쩜 현미를 섞어야
만 현대인 대열에 끼이고 가족건강을 책임지는 완벽주부가 되는 양,
너도나도 성인병 예방이란 구호 앞에 현미에 매달렸다.
나도 예외없이 까슬까슬한 현미를 한 동안 애용했다.
무엇보다 가족 건강을 포장하며 흥미없는 입맛의 호응도를 상승시키려
했지만 워낙 거부의 몸짓이 강하니 결국 더 이상 밥에 섞지 않았다.
"타고난 운명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을까, 우리 살만큼 살자."
그 옛날 가난으로 혼식도 아닌 꽁보리밥을 먹었던 남편은 현미로 인해
적당히 밥 먹는 즐거움마저 빼앗겨 버린다고 내게 노래를 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현미는 고사하고 꽁보리밥만 먹고도 오래 장수했다며
나의 어설픈 가족 건강론을 한 겨울 잠시 내민 햇살 한 조각 마냥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밥상에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이 등장했
다. 일전에 사우나에서 들은 돌팔이 박사(?)의 처방에 의하면 '소화와
변비'에 꽁보리밥이 특효약이라 금방 표가 난다는 것이다. 한국인 특
유의 병, 일명 '빨리 빨리'에 걸려 있는 국민성에 맞게 효과까지 즉시
나타난다니 이 얼마나 귀가 솔깃해 지는 소린가! 돌아오는 길에 즉시
보리쌀 한 봉지 사 갖고 와서 실행에 옮기니 진짜 명의가 따로 없다.
압력 밥솥에 오래 삶아 흰 쌀과 함께 밥상에 내 놓으니 아이에게는 신
기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흰밥이 눈에 익은 탓에 촌스럽고 누런 보리
밥이, 알갱이끼리 서로 붙지 않고 똑똑 떨어지는 그 보리밥이 이색먹거
리 인양 서로 먹으려고 난리를 피운다.
반면에 남편은 여전히 징그러운 벌레 보듯 보리밥을 외면한다.
옷은 흰색을 선호하지 않으면서 밥만은 유일하게 흰색을 고수하려 한
다. 허긴 소화기능이 탁월한 남편은 구태여 보리밥 먹을 필요까지 없
었다. 그 동안 약으로, 과일로 소화를 달래보곤 했었는데, 이런 간단한
보리밥으로 그 위력을 실감하니 역시 귀동냥을 업신여길 일이 아니다.
먹고 난 다음 얼마나 소화가 잘 되는지 화장실 순번을 정해 놓지 않으
면 뒷사람의 눈총을 받을 만큼 아이와 나는 들락거렸다. 언제나 남편이
오래 이용하던 해우소(解愚所)를 이젠 모자(母子)가 분주하게 출입했
던 것이다. 소화의 장점 못지 않게 단점도 들어 났는데, 예상치도 않는
멜로디(?)가 시도 때도 없이 신호를 보내 오는 것이 옥의 티랄까!
혼자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손님이라도 있을라치면 언제 멜로디가
나올지 초조한 마음에 좌불안석이었다. 막내의 작은 엉덩이에서 뿡~~~
하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나는지... 나도 모르게 방귀 소리에 웃음이
터져 나와 보리밥의 위력에 감탄했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본 남편이
보다 못해 하는 말,
"우리 집 식구 이러다 누렇게 뜨는 게 아니야?"
"말하는 당신이 내는 방귀소리는 집채를 흔들던데, 지진보다 누런 게
훨씬 낫지 뭐." 나 역시 질 수 없다는 듯이 냉큼 응수했다.
요사이는 각 가정마다 건강식에 신경을 써 혼식을 권장하지 않아도
알아서 잡곡을 쓴다. 콩을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 간 콩을 쌀에 섞어
밥을 하면 가려내지 않고 잘 먹는다고 한다. 흑미도 간간이 넣어
색에 변화를 준다든지 여러 가지 지혜를 짜내기도 한단다. 이런 정보
을 접하면 나도 흉내내 보리라 마음은 먹는다.
하지만 준비하고도 밥 할 즈음은 얄궂은 건망증이 불쑥 찾아와 까먹
기 일쑤다. 게으른 베짱이 엄마를 둔 우리 가족에게 다소 미안하지만,
그래도 남편만은 내 게으름을 환영한다. 쌀밥만 찾으니까.
며칠 신나게 먹던 보리밥에 아이도 물렸는지 쌀밥만을 먹으려한다.
그래서 내가 꾀를 내고 머리 짜 낸 것이 사골로 구수한 곰탕을 만드
는 것이다. 여기에 밥을 말면 보리밥이든 쌀밥이든 상관치 않고 먹을
수 있어 나름대로 '굿 아이디어'라며 발상자인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매번 반찬거리도 마땅치 않고, 빈약한 솜씨로 만
드는 것도 귀찮기에 곰탕을 생각한 것이다. 깍두기 외에 밑반찬 낼 필
요가 없기에 순전히 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 꾀를 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속내를 애저녘에 파악한 남편이 내 눈치를 살피고 거든다.
"이제 이 곰탕도 슬슬 물리기 시작하네"
먹을 게 없던 시절에 들으면 호강에 초를 치는 소리라 하겠지만 사실
며칠이나 똑같은 메뉴를 밀었더니 그런 말도 나올 법하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 보리쌀과 함께 어울리는 반찬으로 무엇을 하나?
Say Good Night / Angelic Breez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