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립스틱

와인매니아1 2005. 8. 6. 22:27

무심히 화장품 통 안의 립스틱을 본다.
이제 관심 밖의 립스틱이 희뿌연 세월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그 예전의 패잔병처럼 쓸쓸히 지내고 있다. 어느 시기, 무척 사랑
받으며 어딜 가나 함께 했던 물건이었는데, 어쩌다 반짝이는 달
큰한 빛 속에 잠긴 신세가 되어 버렸는지.....
나에게는 옷차림 만큼이라 다양한 립스틱이 있다.
쇼핑몰의 전시품을 구경하다 색상이 괜찮다 느낌이 들면 즉석
에서 샀다. 몇 년 전만 해도 색상이 고상한 브라운톤이 압도적
이였다. 그런데 아이 눈 높이에 변화가 오듯이 나의 눈높이도
갈수록 고지식한 첨단(?)을 밟아가고 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 즉 60대 어른들은 나이와 비례해서 옷, 양산,
손수건, 등 기호품 색상들이 주로 핑크나 붉은 계통을 선호한다.
그 선택의 기준이 나와 다르다고 고까운 언어로 심심찮게 흉을 보
았고, 그것도 모자라 촌스러움의 극치로 치달린다고 했었다. 그러던
내가 어느 새 고상과는 거리 먼 빨간 색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빨강이 산뜻해 보이고 시선을 끄는 걸 보면 그 전의
엄마세대를 흉 본 입놀림이 나를 향한 비난이 아닌가 싶다. 마음은
아직 푸른 20대 인데, 선택하는 기호와 행동은 어쩔 수 없이 나이
따라 엄마 세대로 바뀌는 모양이다.

옷만큼 유행 타는 품목 중에 립스틱과 눈화장도 한자리하는 것 같다.
화장품 회사의 마케팅 차원과 세계적인 경기 흐름에 따라 가장 민감
하게, 따라가는 것이 립스틱마술이라고 여겨진다. 가볍게 얼굴 변화를
주고, 또 물밀 듯 들어오는 유행에 조화를 맞추기에 그러리라.
그래서 여성이라면 여러 개의 색을 두고 옷에 맞춰 애용하리라 본다.
나는 유행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입술에 살짝 칠하는 화장으로
나의 게으름을 만회하곤 한다. 그래서 내겐 다양한 립스틱이 있는
것이다. 이제 예전 즐겨 바르던 브라운 톤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대신 붉은 색들이 주인의 선택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얼마 전, 아는 여성이 방문하여 우연찮게 내 립스틱을 발랐다.
샤넬의 립스틱, 피카소가 즐겨 사용했을 것 같은 순수하고 선명한
빨간 립스틱를 골라 바르는 것이다. 입술에 덧칠한 그녀는 너무나
곱다고 입을 대며 칭찬을 하길래 그만 주어버렸다.
나 역시 그 색상과 처음 만났을 때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었다.
너무 푸른 하늘을 보면 눈이 시리듯 그 강렬한 색상이 일순 눈을
잡아 맸던 건 자연스러웠다. 즉흥 구입이 대개 그렇듯이 금방 혹해
구입하다보면 다음날 적잖게 후회도 한다. 몇 번 경험자로서 냉정
하자, 현혹되지 말자 마음을 다잡고 그 자리를 못 본 체 떠났었다.
그런데 집에 귀가한 직후 이상한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복잡한 심경이 되어 눈에 색이 아롱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당찮은 탄식까지 흐른다.
'후회할지라도 구입할 것을,,,, 그래, 내일 가서 꼭 사자'.
그래서 다음날 내 품에 안긴 빨강 립스틱이 바로 샤넬 립스틱이었다.
하룻밤 속을 태워 구입한 만큼 오래 동안 내 사랑을 독차지 할 줄
알았는데, 빨리 끓는 물이 금방 식는다는 진리처럼 그 빨강색은 금방
시들해지고 말았다. 아마 소유하지 않고 그냥 멋진 색이라고 지나쳤
더라면 그 색은 영원히 환상적 색으로 나의 기억에 남았을 텐데....

이 세상 모든 것은 소유하지 못했을 때 아름다운 것이지, 일단 내 것
이 것이 되고 나면 곧 흥미를 잃게 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
닐까. 산에 핀 들꽃도 그냥 두고 보는 것보다 꺾어서 집에 두면 금방
시들어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립스틱이 내 곁을 떠난 후 잠시
소유하지 못해 애석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그 무렵 내게도 이쁜
색상이 많았음에도 어떻게 그 물건을 구입하지 못해 그렇게 안타까워
했는지,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우리 주위에 소유로 인한 집착으로 얽킨 것이 이런 하찮은 물건뿐일
까. 어쩜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통속적인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처럼 평범한 사랑이야기에서 가끔
소유(?)로 인한 불유쾌한 '거리'도 전해진다. 요사이 사랑이란 개념이
예전과는 많이 변질되어 있지만, 소유차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열정과 시간투자 등 온갖 희생을 아끼지 않
는 남자도 일단 소유라는 전철을 밟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의 앞면
바꾸는 사례도 가끔 접한다. 물론 드물게 일편단심 민들레 경우도 있
지만. 해서 젊은이들의 사랑방식은 서로 부담 지우지 않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런 사랑방정식이 현명한지 아닌지 기성세대인 나로서는 애
매하지만, 현대인의 흐름이 애틋한 사랑감정보다 한 순간의 쾌락을
중시한다는 이야기는 씁쓰레하기만 하다.

내게 소유되었다는 이유로 서푼어치 사랑도 받지 못한 나의 립스틱
들. 불행히도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게 된 지금, 분명 사랑 받을 수
있는 임자를 맞추어 주면 좋겠는데, 누가 중고품을 환영이나 하겠나?
화려한 것은 일순간 우리의 눈을 유혹하며 즐겁게 해줄지언정, 영원
하지 못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하찮은 것 하나만 봐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이게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