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여자
모리스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와인매니아1
2005. 8. 30. 14:34
모리스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1883∼1955 "
"나는 나의 작품에서 시든 꽃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

집들이 고독하면 사람보다 더 쓸쓸할 수 있다.
거리가 황폐하면 사람보다 더 무정해 질 수 있다.
풍경이 늙으면 사람보다 더 아득해 질 수 있다.
-햇살 속에 발가벗은 中에서 -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나 몽마르트르에서 자라고 몽마르트르를 그리다가 몽마르트르에 묻혔던 몽마르트르의 화가. 어쩌다가(?) 세상에 태어난 사생아였고 14세부터 술을 마셨으며 18세에 이미 주정뱅이가 되었던 사람, 알콜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간 정신병원에서 그림 인생을 시작했던 작가, 그림의 혼이 살아있었던 시절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술에 절은 채 몽마르뜨의 시궁창을 뒹굴어야 했고, 생활이 안정되고 명성을 얻은 만년에는 그림의 혼을 잃어버렸던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
그의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에콜드 파리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합니다.

에꼴 드 파리( Ecole de Paris )
파리에 모여 예술활동을 하던 외국인 예술가집단을 일컫는 말로 일명 파리파라고도 합니다. 파리화파라는 호칭은 그 한계가 매우 막연합니다. 우선 에콜 드 파리라는 명칭부터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경우는 좁은 의미로서, 제 1 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타국에서 파리로 흘러들어 온 일군의 보헤미안 화가들을 가르키며, 두번째로는 보다 넓은 의미로서, 20 세기 초두부터 파리의 미술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화가들을 통틀어 의미합니다. 모리스 위트릴로가 에콜 드 파리의 화가로 묶여지는 것은 두번째의 넓은 의미에서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편의상 다른 유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앙데팡당 계열의 작가들로서 '악마들' 로 일컬어지는 표현주의자들의 작은 집단입니다. 이탈리아 출신 모딜리아니, 러시아 출신 수틴, 프랑스 출신 모리스 위트릴로, 불가리아 출신 파신 등으로 가난과 소외속에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던 보헤미안 들이었죠. 그들은 또 대부분 유태인이었으며 파리파의 근저에 깔려있는 애수와 표현주의적 경향은 이같은 이유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르노아르, 드가의 모델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화가가 된 수잔 발라동입니다. 그녀는 훗날, 화가로 성공하나 교양없고 방종하며, 노상 위트릴로를 잊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위트릴로는 이목구비가 섬세하고 ,말수가 적고 신경질적인 아이였으나, 때로는 격렬하고 감정에 쫒겨서 난폭한짓도 저지릅니다. 이로 인해 직장에서도 한곳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였으며, 1899년에는 마침내 알콜중독으로 입원하는 신세가 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입원했던 병원에서 대증요법으로 주어진 회화제작이 계기가 되어, 그는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후, 그를 술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는 데생과 회화수업을 시키게 되고 이로서 위트릴로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죠. 따라서 대부분의 작품은 자기 주변의 풍경화였고, 그림엽서에서 베낀 것도 많았습니다.

위트릴로와 모딜리아니의 몽마르트신화는 유명합니다. 위트릴로를 찿으려면 시궁창 도랑을 따라가다보면 어디엔가 처박혀 있을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라니 어지간합니다. 또한, 동네사람들은 길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는 그의 이젤을 걷어차곤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방안에서 자신의 동네를 찍은 엽서를 보고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카르코가 지은 <위트릴로 평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위트릴로를 만날 수 있었다. 카운터 옆에 서 있거나 그렇잖으면 벌써 고주망태가 되어 문밖의 시궁창에 드러누워 가끔 "쌍"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사람들은 매정하게도 그를 쫓아냈고 그는 쓰러져서 신음하며, 또 울었다.'
그는 자기그림 몇작품을 주어야만 술한병을 살 수 있었습니다.

1908년경부터 백색시기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의 작품은 석고와 집착제를 혼합하여 사용합니다. 1915년경까지 지속되는 이시기의 그림엔 엷은 때가 묻은 희끄무레한 벽, 어둠침침하고 인적이 없는 거리, 쇠살문이 닫혀 있는 호텔, 교회 등 그가 늘 헤매고 다니는 몽마르트의 구석구석이 등장합니다. 백색시기야말로 위트릴로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시대로서 음주벽은 여전하였으나 걸작품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집니다. 또한, 엘리포르나 옥타브 미로와 같은 미술 평론가로부터 극찬을 받게 되는데, 후에 그는 당신이 파리를 떠난다면 기념으로무엇을 가자고 가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건물의 회벽 한조각을 가지고 가겠다"고 답합니다.

생 피에르 공원에서 본 파리 풍경
이 작품은 1908년에 그려진 것으로 높은 곳에서 부감한 시가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전경의 앙상한 나무와 흰 벽이 어울려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표출된 작품으로 터치가 부드러워 졌을 뿐만 아니라 밀어라도 속삭이는 듯한 밀착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생 드니의 대성당
로댕이 '프랑스 정신의 정화'라고 경탄했다는 생 드니 대성당은 1144년에 세워진 프랑스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 중의 하나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풍광에 마모된 느낌을 짙게 풍기는 검푸름 벽면, 직선적인 구성, 회색으로 뒤덮인 하늘, 경건한 감동이 화면을 지배합니다. 위트릴로 초기의 특색이었던 두꺼운 덧칠이 중후한 감을 가중시킵니다. 고딕 양식에 공명한 위트릴로가 정성을 들여 그린 기념비 적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코탱의 골목
'백색 시기'의 위트릴로 작품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그림입니다. 건물, 돌계단, 가느다란 좁은 길 등이 모두 직선으로 그려져 정연한 구도를 느끼게 하고, 인상적인 흰 벽면들이 통일되어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집집마다의 창엔 덧문이 닫혀지고 돌계단을 오르는 4, 5명의 인적, 그리고 그 상단에 보이는 푸른 나무와 노란 꽃. 견디기 어려운 위트릴로의 아픔이 이렇게 쓸쓸한 골목길의 정경을 그리게 한 영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깊고 외로운 시정이 물씬 풍기는 애수어린 작품입니다.

몽마르트르 풍경
이 그림 역시 백색 시기의 것이며, 몽마르트르의 풍경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합니다. 몽마르트르 술집에서 그의 심장이 고동치고 몽마르트르 거리에는 그의 체취가 담겨져 있는 듯 합니다. 때에 찌든 벽, 직선으로 구축된 건물들이 그의 체취를 물씬하게 풍기는데 원경으로 이어지는 납색 하늘이 서정적입니다. 이 근처를 몽스니 거리라고 부르며, 위트릴로가 살았던 코르토가가 있습니다. 위트릴로의 풍경화 가운데서 아름다움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불랑 망토 교회
위트릴로는 남작에 가깝도록 다작을 했습니다. 유화만도 3천 점을 헤아린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다작 속에서 교회를 그린 그림은 비율로 따져서 높은 편이 못 됩니다. <불랑 망토 교회>와 <샤티용 쉬르 센 교회> 및 <도 이유 교회>, <노트르담>, <생 드니의 대성당>은 위트릴로란 이름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작품입니다. 1938년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거의 광적인 신앙심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씩 기도실에 들어가 눈물의 참회를 하는데 이는 젊었을 때의 방종에 대한 회의와 자책이며, 그의 본질을 나타낸 진실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두유 마을의 교회
짙은 납색 하늘 아래 우뚝 선 교회, 웅장하지는 않지만 중량감이 있고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양괴감이 화면에 가득 차 있습니다. 깊은 흰색과 그 흰색 속에서 튀어나온 약간의 황색과 녹색이 미묘하게 융합되어 태산같이 과묵한 이미지를 낳습니다. 그는 교회를 그리는 자체를 신앙의 표백이나 기도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이렇게까지 깊숙하고 풍요하게, 침묵의 정취로써 포착한 작품이 여타한 화가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나는 나의 작품에서 시든 꽃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

집들이 고독하면 사람보다 더 쓸쓸할 수 있다.
거리가 황폐하면 사람보다 더 무정해 질 수 있다.
풍경이 늙으면 사람보다 더 아득해 질 수 있다.
-햇살 속에 발가벗은 中에서 -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나 몽마르트르에서 자라고 몽마르트르를 그리다가 몽마르트르에 묻혔던 몽마르트르의 화가. 어쩌다가(?) 세상에 태어난 사생아였고 14세부터 술을 마셨으며 18세에 이미 주정뱅이가 되었던 사람, 알콜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간 정신병원에서 그림 인생을 시작했던 작가, 그림의 혼이 살아있었던 시절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술에 절은 채 몽마르뜨의 시궁창을 뒹굴어야 했고, 생활이 안정되고 명성을 얻은 만년에는 그림의 혼을 잃어버렸던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
그의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에콜드 파리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합니다.

에꼴 드 파리( Ecole de Paris )
파리에 모여 예술활동을 하던 외국인 예술가집단을 일컫는 말로 일명 파리파라고도 합니다. 파리화파라는 호칭은 그 한계가 매우 막연합니다. 우선 에콜 드 파리라는 명칭부터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경우는 좁은 의미로서, 제 1 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타국에서 파리로 흘러들어 온 일군의 보헤미안 화가들을 가르키며, 두번째로는 보다 넓은 의미로서, 20 세기 초두부터 파리의 미술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화가들을 통틀어 의미합니다. 모리스 위트릴로가 에콜 드 파리의 화가로 묶여지는 것은 두번째의 넓은 의미에서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편의상 다른 유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앙데팡당 계열의 작가들로서 '악마들' 로 일컬어지는 표현주의자들의 작은 집단입니다. 이탈리아 출신 모딜리아니, 러시아 출신 수틴, 프랑스 출신 모리스 위트릴로, 불가리아 출신 파신 등으로 가난과 소외속에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던 보헤미안 들이었죠. 그들은 또 대부분 유태인이었으며 파리파의 근저에 깔려있는 애수와 표현주의적 경향은 이같은 이유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르노아르, 드가의 모델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화가가 된 수잔 발라동입니다. 그녀는 훗날, 화가로 성공하나 교양없고 방종하며, 노상 위트릴로를 잊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위트릴로는 이목구비가 섬세하고 ,말수가 적고 신경질적인 아이였으나, 때로는 격렬하고 감정에 쫒겨서 난폭한짓도 저지릅니다. 이로 인해 직장에서도 한곳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였으며, 1899년에는 마침내 알콜중독으로 입원하는 신세가 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입원했던 병원에서 대증요법으로 주어진 회화제작이 계기가 되어, 그는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후, 그를 술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는 데생과 회화수업을 시키게 되고 이로서 위트릴로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죠. 따라서 대부분의 작품은 자기 주변의 풍경화였고, 그림엽서에서 베낀 것도 많았습니다.

위트릴로와 모딜리아니의 몽마르트신화는 유명합니다. 위트릴로를 찿으려면 시궁창 도랑을 따라가다보면 어디엔가 처박혀 있을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라니 어지간합니다. 또한, 동네사람들은 길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는 그의 이젤을 걷어차곤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방안에서 자신의 동네를 찍은 엽서를 보고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카르코가 지은 <위트릴로 평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위트릴로를 만날 수 있었다. 카운터 옆에 서 있거나 그렇잖으면 벌써 고주망태가 되어 문밖의 시궁창에 드러누워 가끔 "쌍"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사람들은 매정하게도 그를 쫓아냈고 그는 쓰러져서 신음하며, 또 울었다.'
그는 자기그림 몇작품을 주어야만 술한병을 살 수 있었습니다.

1908년경부터 백색시기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의 작품은 석고와 집착제를 혼합하여 사용합니다. 1915년경까지 지속되는 이시기의 그림엔 엷은 때가 묻은 희끄무레한 벽, 어둠침침하고 인적이 없는 거리, 쇠살문이 닫혀 있는 호텔, 교회 등 그가 늘 헤매고 다니는 몽마르트의 구석구석이 등장합니다. 백색시기야말로 위트릴로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시대로서 음주벽은 여전하였으나 걸작품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집니다. 또한, 엘리포르나 옥타브 미로와 같은 미술 평론가로부터 극찬을 받게 되는데, 후에 그는 당신이 파리를 떠난다면 기념으로무엇을 가자고 가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건물의 회벽 한조각을 가지고 가겠다"고 답합니다.

생 피에르 공원에서 본 파리 풍경
이 작품은 1908년에 그려진 것으로 높은 곳에서 부감한 시가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전경의 앙상한 나무와 흰 벽이 어울려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표출된 작품으로 터치가 부드러워 졌을 뿐만 아니라 밀어라도 속삭이는 듯한 밀착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생 드니의 대성당
로댕이 '프랑스 정신의 정화'라고 경탄했다는 생 드니 대성당은 1144년에 세워진 프랑스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 중의 하나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풍광에 마모된 느낌을 짙게 풍기는 검푸름 벽면, 직선적인 구성, 회색으로 뒤덮인 하늘, 경건한 감동이 화면을 지배합니다. 위트릴로 초기의 특색이었던 두꺼운 덧칠이 중후한 감을 가중시킵니다. 고딕 양식에 공명한 위트릴로가 정성을 들여 그린 기념비 적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코탱의 골목
'백색 시기'의 위트릴로 작품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그림입니다. 건물, 돌계단, 가느다란 좁은 길 등이 모두 직선으로 그려져 정연한 구도를 느끼게 하고, 인상적인 흰 벽면들이 통일되어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집집마다의 창엔 덧문이 닫혀지고 돌계단을 오르는 4, 5명의 인적, 그리고 그 상단에 보이는 푸른 나무와 노란 꽃. 견디기 어려운 위트릴로의 아픔이 이렇게 쓸쓸한 골목길의 정경을 그리게 한 영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깊고 외로운 시정이 물씬 풍기는 애수어린 작품입니다.

몽마르트르 풍경
이 그림 역시 백색 시기의 것이며, 몽마르트르의 풍경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합니다. 몽마르트르 술집에서 그의 심장이 고동치고 몽마르트르 거리에는 그의 체취가 담겨져 있는 듯 합니다. 때에 찌든 벽, 직선으로 구축된 건물들이 그의 체취를 물씬하게 풍기는데 원경으로 이어지는 납색 하늘이 서정적입니다. 이 근처를 몽스니 거리라고 부르며, 위트릴로가 살았던 코르토가가 있습니다. 위트릴로의 풍경화 가운데서 아름다움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불랑 망토 교회
위트릴로는 남작에 가깝도록 다작을 했습니다. 유화만도 3천 점을 헤아린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다작 속에서 교회를 그린 그림은 비율로 따져서 높은 편이 못 됩니다. <불랑 망토 교회>와 <샤티용 쉬르 센 교회> 및 <도 이유 교회>, <노트르담>, <생 드니의 대성당>은 위트릴로란 이름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작품입니다. 1938년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거의 광적인 신앙심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씩 기도실에 들어가 눈물의 참회를 하는데 이는 젊었을 때의 방종에 대한 회의와 자책이며, 그의 본질을 나타낸 진실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두유 마을의 교회
짙은 납색 하늘 아래 우뚝 선 교회, 웅장하지는 않지만 중량감이 있고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양괴감이 화면에 가득 차 있습니다. 깊은 흰색과 그 흰색 속에서 튀어나온 약간의 황색과 녹색이 미묘하게 융합되어 태산같이 과묵한 이미지를 낳습니다. 그는 교회를 그리는 자체를 신앙의 표백이나 기도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이렇게까지 깊숙하고 풍요하게, 침묵의 정취로써 포착한 작품이 여타한 화가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