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인생
사람은 나이가 익을수록 친구가 그립고 소중하다고 한다. 품안의 자식도 잠시 동안 키우는 맛이지, 갈수록 저희 세계가 재미있는 법이고, 남편 역시 자기가 구축한 생활범위가 있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성들은 결혼하기 무섭게 이런저런 살림에 얽매이고 "나" 아닌 "우리" 라는 가족보금자리를 깔끔하게 가꾸기 위해 옛 친구를 챙기는 일에 소홀해지지 않나 싶다. 각각 삶의 터전이 다른 여성들은 삐리릭~ 안부전화로 서로의 고달픈 일상을 토로할 뿐이지 직접 만남 갖기란 그리 녹녹하지 않는 일이다. 잠시 정감 있는 목소리로 서로의 향기를 전달할 수 있겠지만, 그리움 품은 얼굴을 대하며 따뜻한 눈빛을 교환하는 직접만남과 어찌 비교할까! 그래서 여성의 우정은 결혼과 함께 함몰되고 마는 지도 모른다. 요즈음 우리와 떨어져 사시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나이 들어 꼭 가까이 지내는 친구를 둬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그 당시 17세, 요즘 고등학생 나이에 깡촌으로 시집 온 어머니였다. 도대체 부귀영화가 뭔지 삶의 허드렛일 속에 부대껴온 당신의 삶은 흔히 말하는 호강과는 거리 먼 삶이 아니었을까 유추해본다. 옛부터 일복은 타고난다고 했던가. 참으로 우리 속담이 하나 틀리지 않는 것이 어머니를 보면서 수긍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걸레로 쓸고 닦고, 왁스로 광내고. 틈틈이 차곡차곡 정리하고, 어쩌다 편하게 마주앉아 있기 불편하기 짝이 없다. 게으른 내가 보기만 해도 힘든데, 거들어드리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멋진 별명을 하나 지어 주었다 “딱순이”라고..... 신혼 초 어머니와 생활할 때는 이런 바지런한 성품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른다. 하긴 그 덕택에 환한 환경에서 살긴 했지만. 떨어져 사는 지금 좀처럼 우리 집에 오시지 않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쩌다 오면 고까운 눈으로 한마디. '이렇게 해서 어찌 사느냐고' "사람 사는 동네는 모두 비슷해요. 그리고 먼지 좀 먹으면 어때요?" 생활하는데 전혀 문제없다는 듯 난 천연덕스럽게 이쁘게 말대꾸한다.^(^ 이날 이때까지 어머니의 삶은 살림 이외에 전문분야가 없다보니 이웃 여성과의 수다라던지 여가선용을 위한 취미는 어머니 사전에는 없었다. 그저 틈나는 데로 장롱에 윤내고 구석구석 닦는 일로 소일한 것밖에. 어쩌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웃과의 친교와 경노당 출입을 종용해보지만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지나치게 깔끔형이신지라 다른 이의 흐트러진 모습과 관념의 차이를 쉽게 소화 하지 못했다. 이 점이 어머니를 창살 없는 감옥으로 가두어놓고 만 것이다 둥글둥글 원만하지 않은 어머니의 성품을 너무도 잘 아는 남편은 팔순 노인네가 쓸쓸히, 늘 tv와 친구하며 지내는 모습이 안쓰러워 자주 문안전화를 드린다. 그것도 당신의 아들임을 숨기고 타인인 것처럼 엉뚱한 목소리로 장난치는 것도 빼 먹지 않는다. 늘 속으면서 즉시 깨닫지 못하는 (일부러 그러는지) 모자의 모습이 정겹기도 하지만 때론 측은하기도 하다.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서......남편의 지극정성과 확연한 차이가 나지만 어쩌다 전화 넣을 때면 나 역시 가끔 권한다. ‘방바닥과 엑스레이 그만 찍고 화창한 햇살을 등에 업고 나들이하라고.’.. 하지만 놀아본 사람이 잘 놀고, 돈 역시 써 본 사람이 본때 나게 쓰듯 어머니는 원래 집지킴이인냥 그 자리를 지키다 못해 아주 엑스레이 찍다가 강력 본드걸(?)을 택한다. 흔히 노래 못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노래시키면 당사자는 죽을 맛이듯. 역시 외출하기 싫은 사람에게 자꾸 나가라고 종용 하면 결국은 엉뚱한 오해를 듣기도 한다 수년 전까지 시아버지 수족이 되어 잠시도 쉴 틈이 없던 어머니는 마침내 화려한 싱글이 되어서야 경험도 없던 고독의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딱순이 노릇도 하루 이틀이지, 요즘은 무한정 주어진 고독을 어찌 요리해야 할지 막막한 모양이다. 삶 속의 온갖 괴로움 쓸쓸함이 인생을 길게 만드시는지 이제는 진정 '가고' 싶다고,..... 숨쉬는 것이 지겹다고 넋두리를 하신다. 그 말속에 자식들을 향한 약간의 서운함도 묻어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자식에게 짐스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자기 연민의 대사도 포함되었다. 나이 들어 온몸이 아프고 뚜렷한 즐거움도 없는 하루 일상에 더 이상 재미와 흥미가 없음을 노인들은 공감하리라. 아니 젊은 우리들도 능히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고 우린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우린 세상 좋은 면을 누리 면서도 지겹다지겹다 송(sing)을 뱉는데, 대화소통도, 온기 묻은 눈빛도 맞추지 않은 날들이 그녀에게 오죽 지겨웠을까 생각하니 그만 내 마음이, 어머니에게 여전히 철부지인 내가 찡해 온다. 예전처럼 정신과 육신이 생생할 때 흔한 국민오락인 고스톱이라도 배워 뒀더라면 동네 어른들과 10원짜리 소일꺼리도 수월하건만, 그 표도나지 않은 "딱순이" 노릇에 일생의 목숨을 건 덕택에 이웃도, 도란도란 흉볼 말벗도 두지 않은 어머니의 현 모습이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연륜에 보탤 수 있는 정신의 무게에 다시 소홀하지 말아야겠다는 자극을 어머니의 씁쓰레한 언행에서 다시 깨닫는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가끔 접하면서 희미하게 웃어본다. 여건만 받쳐주면 더 없이 살기 좋은 세상을 지겹다는 노인이 계시는 반면, 젊은이 못지않게 황혼의 신바람에 살맛을 느끼는 분도 있다. 미래 예비 노인네가 될 우리의 일상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노후대책 로드맵도 지금부터 준비할 일이다. 날마다 쏟아지는 지식과 정보, 곳곳에 휘날리는 여가선용의 유혹문구 세분된 취미생활의 목록들에 지금이라도 관심 가져야 되지 않을지 생각해 본다. 반복되는 일상이 덜 지루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연락이 뜸한 친구들과의 교류도 가꾸어 가면서 나이를 보태야 겠는데.. 하지만 그 역시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반복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 을까! 경리과는 더하고 빼고 또 더하고 빼고, 산부인과 의사는 본 데 또 보고, 가수들은 부른 노래 또 부르고, 나 역시 했던 말 또 하면서 사는 것을...그려면서 '지겹다지겹다' 소리 빼먹지 않고 되씹으며 살아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 아닌가. 우린 이렇게 늘 똑같은 반복을 되풀이하면서 늙어 가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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