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다가오는 소리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
여름이 과거의 시간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지 위의 일체의 수분을 빨아들일 듯한 강렬한 태양열, 아스팔트에 쏟
아져 내리던 희디흰 화염이 내 존재와 공간을 무기력하게 만들더니만...
어느 순간 뚜르르~~풀벌레소리와 함께 자연의 탈바꿈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끈적한 열대야와 앵앵대는 모기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한
날들이 이젠 오랜 역사 같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 유난히 모기떼의
극성에 시달렸다. 지금쯤 세인의 관심 속에 묻혀버림직한 씨랜드 수련원
화재도 301호실에 피워 놓은 모기향이 원인이라고 말할 만큼 과히 모기
와의 전쟁도 치른 여름이었다.
높아진 하늘과 리어카의 풍성한 과일소쿠리에 계절의 순환이 보이는 듯
하다. 거리마다 푸른 잎사귀처럼 풋풋한 젊음은 변함없이 쏟아져 내리는
데, 그네들을 유혹하는 거리 상품과 전시된 쇼윈도 옷들은 차분한 가을
톤으로 변신해있다. 원색의 아슬아슬함보다 다소 성숙한 여인네의 내음
이라고 할까. 투명한 대기 속의 화려한 여름풍경은 그렇게 소리 죽여 우
리 곁을 달아나고 있었다.
문득 눈을 돌려 벽 중앙의 네모난 창문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고독한 내 사고와 벗해 줄 별님이라도 찾아와 주면 좋으련만, 어쩐 일인
지 어둠보다 한결 무거운 쓸쓸한 바람만이 내 곁을 지켜준다. 한밤의 밤
바람과 지나가는 행인의 주정소리가 귀와 뺨을 어루만진다. 조금 전에
사온 여러 향들, 레몬, 후로랄, 오렌지 향이 지금 곁에 웅크리고 있는 소
슬바람과 절묘하게 믹서 되어 방안 가득 독특한 향기 풍기며 나를 취하
게 만든다.
밤의 소리를 먹으며 어둠의 빛이 서서히 점령하고 있다. 이 밤이 지나
새 날이 열리면 새로운 희망이, 근거 없는 희망이 날개 짓 할지도 모를
일이다. 모기가 인간에게 항복을 종용하던 '모기와의 전쟁'을 위시해 기
나긴 아이의 여름 방학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시점이고 보니 막연한 희
망이 부풀어오른다. 그 동안 나름대로 작성한 과제물을 챙기던 아이도
엄마 못지 않게 시원함과 어떤 기대감으로 불확실한 새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실밥 뭉치처럼 내 신경을 헝클어 놓은 아이는 어쩌면 자기대로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지 못한 아쉬움에 누구보다 엄마로부터 해방감을
맛보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성실로서 내
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 했거늘, 아이는 흐르는 강물처럼 저절로 뭔
가 늘 채워진다고 믿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던 지난날들이 갑자기 생각의 상처가 되어 쓰다
듬어 진다. 미진한 학습을 채워주겠다는 명분으로 강압적으로, 때로는 치
사한 방법으로 머리에 넣기 싫어 발악하던 아이를 잡고 얼마나 힘든 시
간들을 보냈던가. 도대체 공부가 뭔데.. 하는 회의감은 아이보다 엄마가
더 느끼면서 무의식에 가까운 습관은 공부 제일주의로 치닫게 만든다.
케케묵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말은 수 없이 외치지만, 암
만해도 단단히 굳은 내 머리로는 힘에 부치는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아이의 여름방학은 수해(水害)로, 언제나 빗겨가지 않고 찾아온 게릴라
식 폭우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만큼은 아니라도, 그에 못지 않
게 원망과 절망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인생에 너무 끼여들어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
만, 그래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은 것이 우리
네 삶인 것을......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킨 계기로 받아 줬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어볼 수밖에.
가을이 사각거리며 창 틈으로 스며드는 소리가 난다.....소리도 없이.
가을을 생각하면 깃 세운 바바리 코트에 왠지 스산한 낭만이 먼저 자리
잡힌다. 오곡백과 풍성한 결실의 계절보다, 꽉 여문 누른 벼이삭보다 뭔
가 텅 빈 쓸쓸함, 우수수~~떨어지는 조락(凋落)과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연약함이 먼저 머리를 채운다. 그래도 가을은 젊은 연인들이 꽉 껴안은
모습이 눈에 띄어 한결 따뜻하다.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운치를 느
낄 수 있는 계절이라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거뭇거뭇한 낯선 하루에 내가 서 있다.
성큼 다가와 있는 계절의 모퉁이를 반기며 얼룩진 지난 시간들을 하얀
연기처럼 날려보낸다. 다소 못다 이룬 여름날의 동화에 미련 뗄 수는 없
지만, 어느 순간 다가 온 가을날의 동화에 꿈을 싣고 새로운 텃밭에 호
미질을 하리라. 연한 블랙커피 향기를 앞에 두고 행복한 부담을 맡아본
다. 이 가을은 이렇게 내게 다가와 나의 연륜을 더 주름지게 만드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