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화려한 외식

와인매니아1 2002. 3. 18. 23:41

산들의 검은 그림자가 어둠보다 한결 검고 무겁게 길을 응시하고 있다.
투명한 사이다거품처럼 화사한 낮은 까마득히 추락해 버렸는지 어둠은
소리 죽여 숨쉬고 있었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해안도로를 거슬러 가니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이 친숙하게 와 닿는다. 화려한 밤풍경을 수놓은
광섬유(光纖維)가 낯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다.
바쁘게 지내는 남자친구가 오전에 전화가 왔었다. 점심 함께 하자고...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그 흔한 점심한끼 변변히 나누지 못했다, 마침
선약된 입장이라 할수 없이 저녁으로 돌리자 했다. 이른 저녁을 챙기는데
아이는 묻는다. 어디 가느냐고...숫제 남편보다 아이가 더 궁금해 여긴다.

"신정 때 너에게 장난감 사준 아저씨하고 식사하기로 했단다"
"나도 따라갈래,"
이번 신정때 우연히 만나 자기에게 장난감을 사준 것을 기억하고 또 사줄
줄 알고 따라나선다는 거다. 영악한 요즘 아이들답게 잔꾀 피우는 것을
남편은 기차다는 듯 '너 때문에 엄마가 바람도 못피운다'고 엄살을 부린다.
집앞까지 나를 데리러 온 친구는 여전히 사람좋은 웃음을 달고 있었다.
비록 먼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사는 벗일지라도 역시 이성과의 만남은
유쾌하다. 역시 나이 들던 어리던 편안한 이성은 좋은 모양이다.
최근에 모래처럼 돈을 쏟아붓은 근사한 레스토랑을 지정해 주면서
'거금이 들텐데' 이런 걱정을 하니 '까짓것'....호쾌하게 받아 넘긴다.
이 말투가 계산서보고도 늠름하게 변하지 않아야 될텐데 .......하하하

차가운 바닷바람을 가르며 불란서 영화에 등장하는 레스토랑에 당도했다.
낯선 세상에 당도한 여행자처럼 친구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이런 곳이!!!!!
진짜 괜찮다고 감탄을 마구해댄다. 따뜻할 것 같은 목조 건물로 들어가니
입구에서 깍듯이 맞아주는 써빙남녀의 환한 미소에 벌써 흥분이 된다.
실내는 때마침 헨델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잔잔히 흐르며 분위기를
더욱 고급스럽게 만들어 주어, 진짜 귀부인이 된 것처럼 우아해졌다.
환하게 통유리로 꾸민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창넘어 바깥세상은 신비로
가득 차 보인다. 샹들리제 조명은 안팎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 지어주었고
밝은 불빛은 이제 서로의 잡티까지 거침없이 비출만큼 아주 환했다.
긴장이 풀린 엉둥이를 붙이고 친구는 말한다, 한달 마다 한번씩 여기오자고
"싫어. 일주일마다 오자고하면 몰라도.........하하하"

사진이 삽입된 메뉴판이 도착했고 페이지를 넘긴 친구의 입에서는 급기야
칼든 강도가 따로 없다는 소리를 내 지른다. ( 내 그럴 줄 알았지..)
명색이 수십억이 투자되었는데 일반 음식값하고야 같을 수 있을까.....
조금전의 황홀한 표정은 절대 아닌 것 같아 인심 써주는 차원에서 적당한
메뉴를 골라 시켰다. 어짜피 분위기를 먹는거지 음식은 2차적이니까....
"트리플과 리베 스테이크"
테이블 세팅에 어울리게 붉은 와인을 근사하게 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친구가 주책없이 엉엉 울 것 같아 상념을 삼키고 갸냘픈 맥주를 시켰다.
질(質)보다 량(量)을 우선하는 친구는 밥을 듬뿍 담아줄 것을 요구하고
진짜 보통의 두배 밥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요상한 음식도...
보통 스테이크라 하면 소고기가 주재료로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닭다리에
특이한 소세지, 그리고 이상한 고기 등 요란하게 나오자 호기심이 생겼다.

"아가씨, 여기 재료가 뭔가요?"
아줌마는 용감했다, 제3의 성으로 분류할 만큼 특이한 이름표를 앞세우고
난 서빙하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예전 같으면 틀림없이 고상 포즈 잡으며
잠잠했겠지만 이제 그 고상도 궁금증 앞에 무용지물이 된다.

"양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입니다"
3가지 고기가 등장한 친구 것에 비하면 내껀 너무나 볼품없는 고기덩이였다.
넙적한 돼지 바베큐에 시큼한 캐찹이 듬뿍 얹어져 있을 뿐이다. 탁월한 선택
한 친구에게 반(半)을 들어주고 친구 역시 내게 맛보라고 쪼끔 건네준다..
음.......내 것보다 역시 맛이 있다. 역시 남의 것이 맛있는 모양이다.
통닭 뜯듯이 다리잡고 먹는 폼이 이 분위기랑 어울리지 않는 마치 코메디
같다. 하지만 비싼 음식을 남기고 갈 친구는 절대 아니기에 졸지에 닭다리
잡고 흉한 자세를 취해야 하지 않겠나!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생긴데로, 하던 방식데로 행해야 병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설거지도 가볍게 만들려고 친구는 커다란 접시를 깔끔하게 비웠다.
짠~~부딪히며 건배한 맥주도, 그리고 아이스크림과 빵조차도 말끔히....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역시 배속이 든든하면 사람은 여유가 있어지나보다,
식사 중 많은 대화를 했건만 빵빵하게 먹고 난 후 아기자기한 담소는
끝날 줄 모른다. 역시 무드가 인격적 대화를 무르익게 만드는 것 같다.

새 사업시작한지 이제 일년이 채 안된 친구의 바쁜 모습이 보기 좋다.
안정된 직장을 던질 때는 다소 무모하게 보이더만 역시 젊음이 무기인지
과감한 변신에 성공한 친구는 지인의 우려를 보기좋게 내 패댕겨쳤다.
더욱 사업이 잘돼 자주 이런 곳에 오자는 말을 되씹으며 우리의 저녁
데이트는 그 곳의 분위기처럼 아름답게 마감했다. 되돌아오는 중간중간
새로 등장한 토담집 화려한 입간판을 눈여겨보며 이 다음 저 장소에서
다시 해후할 것을 약속하며 화려한 외식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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