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여자

울진 남사고 선생의 묘지

와인매니아1 2012. 11. 23. 15:11

 

지난 4일 울진 격암 남사고 선생의 묘를 답사했었는데 이제사 그 모습을 올려본다.

풍수지리의 대가이자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의 비결에 도통하여 많은 예언을

-임진왜란을 예언-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터이다-- 전한다.

풍수지리학에 조옝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문집에 격암일고가 있고 봉래 양사언선생이 남사고의 제자이다.

 

남사고의 본관(本貫)은 영양(英陽)으로 始祖 남민의 7대손 진용(鎭勇)의 세 아들 중 맏아들 홍보(洪甫)의 후손들로써 남사고는 홍보의 11대 손이다. 


영양 남씨의 유래는 시조 남민이 원래 당나라 사람 김충이었는데 신라에 귀화하여 신라왕으로부터 남씨성을 하사받고 영양을 식읍(食邑)으로 받은 데서 유래 

한다.격암 남사고는 호의 증손자로써 홍보의 11세 손이나 사고(師古)의 가계(家系)는 사고의 아들대에서 끊어졌다가 1794년 정조(正祖) 18년에 출생한 21세(世) 명옥(命玉)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격암 남사고는 중종 4년(1509) 이조좌랑(吏曺佐郞)을 지낸 희백(希伯)의 아들로 지금의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성황당 터에서 태어나,선조 4년(1571) 63세에 별세하였다.

그의 자(字)는 경원(景元) 혹은 복초(復初)․경초(景初)라 했으며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사물에 나이가 이치를 찾는다 는 의미)"의 "격"자를 따서 호(號)를 격암(格菴)이라 했다고 한다.

그는 유년(幼年) 시절에 책읽기를 좋아하고 평소 기거동작(起居動作)은 말하는 것이나 웃는 것이 간결하면서도 온후하고 의젓하여,학문이나 재물등을 구차하게 얻는 것을 원치 않고 삼가는 면이 많았으며 절제된 자세를 견지하여 처음부터 큰 뜻을 세운 대인(大人)의 기상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평해인(平海人) 황응청(黃應淸)과 함께 길을 가다가 붉은 띠로 장식 된 패도(佩刀)를 보고서도 그냥 지나친 일화를 남긴 것이나, 평소 소학(小學)을 옆에다 두고 읽으면서 도학자로서의 풍모(風貌)를 유지하는 지침서로 삼은 것은 대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격암은 그와 같은 의연하고도 고결(高潔)한 인품을 소유하였으면서도 호방(豪放)하고 낙천(樂天)적인 삶을 살았다. 술을 즐기는 그를 위해 부인이 우여곡절 끝에 술을 담아 놓으면,그것이 채 익기도 전에 표주박을 띄워 자작(自酌)하고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술동이가 바닥이 보인 뒤에야 끝을 내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즐기려는 것을 자신의 낙천적인 성격 탓으로 돌리며 오히려 분방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답답해 했다.

그런 연유(緣由)로 그의 가세가 기울어 설두(雪竇)에서 남수산(嵐峀山) 밑으로 옮겨가 살 때도,달팽이집 같은 작은 집에서 돗자리 조각을 달아 문으로 사용하는 등 비바람도 제대로 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집 앞에 몇 층계의 화단을 만들고 화초들을 여기 저기 심어 두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면 시를 지어 읊조리곤 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며 즐기는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그는 일생동안 내면적 수신(修身)과 도덕성의 함양에 매진하면서도 외면적으로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자유 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인격을 형성하였다.

격암이 활동하였던 16세기에는 기득권을 배경으로 독점 체제를 확보하고 있던 소수 훈구(勳舊)세력과 중종 후기 이후 명종대에 걸쳐 왕실의 외척(外戚)인 김안로(金安老)․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심통원(沈通源)등의 척신(戚臣)세력이 훈척세력(勳戚勢力)을 형성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개인의 경제기반을 확대해 나감으로서 국가의 토지가 잠식되고 조세체계가 와해되었다.

이들은 집권층이 갖추어야 할 도덕성과 국가운영의 경영철학을 갖추지 못해 정치 사회적 혼란과 경제의 피폐와 파탄을 초래했다.

이 시대 백성들은 국가의 과중한 조세와 國役(국역), 軍役(군역)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양민층의 대규모 토지이탈 현상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으며, 특히 “경상도 일대의 백성들이 유리 걸식을 하고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다"라고 명종 실록은 전한다.

이러한 모순(矛盾) 시대는 결국 명종14년 1559년 황해도에서 임꺽정의 민란(民亂)을 불러 일으켰으며, 명종20년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대비(尹大妃)의 사망을 계기로 사림파(士林派)의 탄핵을 받은 윤원형이 실각하고 보우(普雨)가 축출되면서 훈척 정권의 급속한 몰락을 가져왔다.

시대적 변환기를 맞아 명종 19년(1564)경 인재의 광범위한 발탁을 과시하는 상징적 의미로, 울진 현령이 효렴(孝廉:효도가 지극하고 청렴한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것)으로 조정에 천거(薦擧)하여 종9품의 미관 말직인 사직 참봉(社稷參奉)을 제수(除授)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자질과 학문적 수준을 고려한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그에게 포부를 무너뜨리고 좌절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마지못해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곧 바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훈척 정권이 와해되고 사림 정권이 대두한 선조(宣祖) 초에 종6품의 관상감(觀象監:천문․지리․명리 담당 관청) 내 천문 교수로 발탁되었다.

이는 그가 유학보다 천문․지리에 능통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뒷받침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  南師古의 九遷十葬(남사고의 구천십장)

 


"남사고가 자기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기 위하여 명당을 구해서 장사를 지낸 뒤에 그 묘터를

보니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묘자리를 여러 번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한 묘터를 얻게 되었는데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는 용이 날아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비룡상천(飛龍上天)의 형국(形局)이었다.

남사고는 너무 좋아 그의 아버지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다. 장사를 지내며 흙을 퍼다가

봉분을 쌓았다. 이때의 일을 거들던 한 일꾼이 노래를 불렀다.

 

"구천십장(九遷十葬) 남사고야"

“비룡상천(飛龍上天) 생각마라”

"사사괘지혈(死巳掛枝穴)을 왜 모르느냐?"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 장사 지내는 남사고야!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만 생각하지 마라.

말라 죽은 뱀이 나뭇가지에 걸린 형국을 왜 모르느냐?"-

 

 남사고가 듣고서 놀랍고 이상하여 산 형세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과연 죽은 내룡(來龍)이었다.

급히 그 일꾼을 따라 나섰지만 갑자기 보이지 않고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당이란 제각기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어서 억지로 차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제서야 남사고는 탄식하고, 겨우 피해가 없는 정도의 묘터를 가려 다시 옮겨 장사지냈다.


남사고가 선친의 묘를 두 번씩 옮겼어도 오히려 길지를 얻지 못해서 세 번째로 대현산(大峴山)으로 옮겼다. 장사를 모두 마치고 골짜기를 나와서 그곳을 바라보고 “저 산은 반드시 후사가 끊어지고 말 것이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하고 대성 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과연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세 번이 일곱이 되고 열이 되었고 열이 다시 백이 되어 믿을 수 없는 말들이 도도하게 전국을 가득 채우게 되었으니, 한 잔의 물로 한 수레의 타는 나무를 어찌 대적해 끌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대로 맡겨 둘 뿐이다ꡓ(移葬은 세 번 뿐이었다.)

격암 선생은 지리술에 통달했지만, 부친이 명당자리와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후손이 끊어지는 줄 알면서도 더 이상 이장을 하지 않고 하늘의 순리(順理)에 따랐다.

남사고유적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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