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리뷰(서평 모음)

너무나 쓸쓸한 당신

와인매니아1 2002. 10. 19. 19:41


모눈종이 눈금을 하나씩 매우 듯 우리네 나이를 차곡차곡 채우는 것,
추하지 않게 곱게 익어가기, 그리고 세월의 강을 그 누구와 평생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늙어간다는 것.... 박완서님의 단편소설집을 접하고
난 뒤 느낀 단어들이다.
'너무나 쓸쓸한 당신'이란 타이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생의 쓸쓸함을
맛볼 수 있는, 조금은 인생의 맛이 어떤지 알만한 초로(初老)의 노인들
이야기이다. 그 외 여러 단편들 역시 현실적인 노인들 문제, 치매와 자
식과의 관계 등 곧 칠순(七旬)을 바라보는 원로작가의 시각을 통해
예리하게 다루어진, 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다.

늦깎이로 데뷔한 작가의 창작열은 일찍 문단에 데뷔한 사람 못지 않게
대단한 파문을 몰고 왔다. 또 억지스러움 없이 술술 나오는 그녀만의
언어와 표현력에 아낌없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 자연스러움이란
나와 내 이웃 가족의 일상사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우리 모두인 '당신'은 어느 날 넘치는 고독과 함께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리고 노년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껴안고 살게 마련이다. 살아가는 동안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린다.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젊게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보지만, 찾아오는 늙음을 거부할
힘이 우리들에겐 없다.

고독한 시간에 벗해 주는 한잔의 커피를 앞에 놓고 나 역시 늙어간다는
것에 조금은 초조함을 맛본다. 젊음이 왕성할 때의 에너지만큼 고약한
심술과 이기적 탐욕이 반작용으로 생긴다면 어쩌나 하는 심사가 바짝
고개를 쳐든다. 지금도 청개구리 기질이 다분해 꼼꼼한 남편의 심기를
편찮게 만드는데, 연륜이 익어 노년의 공포인 '치매'라도 찾아오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두고두고 원수덩어리가 되지 않을까 벌써 걱정이 앞선다.
아무리 완숙미가 우아하다 해도 늙음은 젊음과 비교할 성질이 아니며,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가까워지기에 또한 서글프다. 문득문득 침입하는
정신적 공허감, 모래처럼 술술 새는 상실감이 그렇고, 나이테처럼 켜를
늘려 가는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육체적으로 쇠잔해 가는 체력이 그렇다.
그래도 노년의 작가는 당당하다.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
맛은 여전하다고, 사는 맛이 맛있다고' 작가는 스스로 대견해 여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이 느낀 쓸쓸한 당신은 스스로 원해서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얽매여 사는 초라한 남편을 지칭한다. 결혼이란 하나의
'선택'을 통해 가족 중 자식 장래를 위해 아예 다른 길의 선택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일반적인 규범을 따르는 우리네 엄마이기도 하다.
반면 월급봉투만 축내지 않으면 가장권위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믿는
남편과는 그저 형식적 관계만 유지한다. 자식의 학업을 위해 별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납득시킨다. 남편 역시 명예 퇴직 후 아내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착실하게 혼자 살 궁리를 해오듯, 이들 부부에게
고요한 파탄은 애당초 시작되고 있었던 터다.

이야기의 시작은 아들의 대학 졸업식, 모처럼 사돈끼리 대면한 자리에
남편의 옹색한 초라, 촌스러움을 보고는 여성의 심기는 불편해 진다.
그러잖아도 처가살이하는 아들에 대한 묘한 배신감에 모종의 훼방을
놓고 싶은 심정인데, 품위 있는 안사돈까지 합세해 그녀를 무참하게
만든다. 졸업식 날 빈손으로 나타난 사돈의 행동에 장모는 동정이랄까
체면을 위한 배려랄까........ 장모가 마련한 흰 봉투를 아들내외에게
주라는 말에 남자 쪽 엄마는 뜬끔없는 행동을 일으킴으로서 복잡한
노인 심리를 잠시 엿보게 해 준다.

흔히 결혼한 여성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아도 "시"
자 붙은 족속들은 남녀불문하고 다 어렵고 편치 않더라는 것이다.
한번쯤 시댁에 대한 불편함을 느껴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법한 말이다.
아들 내외의 여행티켓을 들고 촌스런 남편과의 계획에도 없던 러브호텔
행을 감행한 그 여성의 내면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기 위함일까.
젊은 얘들의 여행에 막연히 시샘도 아닌 보기 좋은 행복에 조금 초를
치고 싶은 심술, 이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고약한 시어머니만의 특권
이라 하기엔 아들 내외에게 보여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았다.

시어른의 경망한 행동에도 여전히 딸 가진 부모들의 아량은 태평양 같다.
모종의 쾌감을 느끼리라 믿었던 그녀의 심술이 안사돈의 상냥하고 간결한
한마디에 그만 촌극이 자기를 향한 비웃음으로 되돌아 올 줄이야 누가 알
았겠나. 이젠 누가 쓸쓸한 당신인지 구분이 모호한 그녀와 그녀의 남편.
남편의 벗은 육체를 보며 닭살 같은 혐오감과 함께 목구멍으로 뜨겁게
차 오르는 연민의 정...손톱 밑에 때가 낀 투박한 손, 그의 초라하고 고달
픈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오면서 연민이 여인의 가슴을 물들인다.
세월의 때가 낀 고가구를 어루만지듯이 남편의 정강이에 모기 물린 자국을
가만히 어루만지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초로에 든 사람들에게 부부만큼 서로를 위해주는 관계도 없다고 한다.
반쪽을 잃고 양지바른 곳에서 하루하루를 죽이는 노인네들을 보면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측은하여 새삼 쓸쓸한 눈길을 한번 주게 된다. 젊은 시절
활동과 기력이 좋을 때의 부부는 불확실한 미래의 안락한 삶을 위해, 보다
자식들의 밝은 생활을 위해 각박한 삶의 현장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조금은
잊은 채 녹슨 세월의 시간을 보내곤 한다.

무관심 속에 식어버린 커피 같은 부부관계와 달리 자녀에게 기울이는 사랑은
자못 다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무조건 사랑을 베풀며 귀여운 새싹이
우리들 삶을 대신 살아주는 냥 온갖 희생을 감행한다, 때론 자식으로부터 말
할 수 없는 구박과 냉대로 가슴에 멍을 안으며 살아가는 현실과 맞닥뜨린다.
인생은 언제나 한 박자 뒤늦게 깨닫듯이 함께 호흡하며 부대낄 때는 사랑한
다는 말에 인색할 수도 있고, 겉으로 드러내기가 쑥스러워 속으로 삼키며 생
활하는 부부들도 우리 주위에 많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상처 없는 아픔과 절망 없는 고통을 어깨에 맨
채 그럭저럭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추락으로 떨어질지라도 우린 굴곡이 심한 삶도 잘도 견뎌 내고 있다.
'너무나 쓸쓸한 당신'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들 미래의 모습이 될 수 있기에,
이제라도 측은지심을 가지고 더욱 관심 기울려야 하는 대상이 자식보다 바로
나의 평생지기가 아닐는지 다시금 생각해 본다.

늙어간다는 것, 화장술로 성형수술로 조금은 커버를 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푸른 풀잎에 이슬처럼 투명한 젊음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리라.
나이 들어서도 지금처럼 푸른 청춘의 꿈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고,
아울러 삶의 한때를 흔들어 놓은 사람,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준
자기 동반자에게 더욱 관심 기울일 수밖에 달리 도리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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