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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거짓말

와인매니아1 2005. 8. 6. 22:19

가끔 나자신도 모를 이상한 면을 나에게서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20대의 원색같은 열정을 지나서, 중후하고 은은한 멋 풍기는 이차색의
중년이 되면 침착(沈着)과 성숙도가 비례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친구와 포도주는 묵을수록 좋다고 하건만 타인들에게 비친 내 모습은
안정 되어 보일지 몰라도, 정작 나는 묵을수록 기능들이 녹슬고 있다.
'쓰고 있는 열쇠는 항상 빛난다' 는 서양 속담을 평소 염두에 두었다.
누구에게나 항상 쓰고 있는 열쇠처럼 항상 빛나게 보여야지, 이런 야
무진 생각을 가졌지만, 세월의 순리는 어쩌지 못하나보다.
강물은 높은 곳을 만나면 돌아 흐르고 웅덩이를 만나면 고였다 흐르듯
나 역시 세월의 강물을, 건망증의 그림자를 빗겨 갈 수 없는 것이다.
이 건망증은 내 무력감을 여지없이 들추어내고 한숨짓게 만든다.

지난 주 쇼핑 때의 일이다. 집 근처에도 대형 마켓이 있지만 야외로
드라이브 삼아 남편과 함께 쇼핑을 나가곤 했다. 쇼핑 풍경 중 마치
내일 전쟁이 일어난 냥 잔뜩 사제기 하는 것에 의아해 여기곤 했다.
근데 어느 새 나도 그들을 닮아 가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우리는
주체가 됐을 때와 관찰자가 되었을 때 해석이 너무 다르다. 즉 내게
필요품이니까, 값이 싸니까 이런 이유로 내 사제기는 지극히 정당하다.
특히 특가세일이란 표가 붙은 것에는 불필요 품목임에도 왠지 목숨(?)
걸다시피 건져야 흡족한 쇼핑이 되는 줄 안다. 그런 목록일수록 분명
과소비임을, 나중에 후회됨을 알면서도 그 순간은 잠시 망각한다

내 요리 중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가 계란이다. 앙꼬 없는 찐빵을 상상
할수 없듯 계란없는 냉장고는 도무지 꿈 꿀 수 없다. 해서 계란이 한
두개 남았다면 열일 제치고 계란부터 보충해 놓아야 안심된다. 다행히
이제껏 계란 요리(우리집은 후라이도 요리라 칭함)를 물릴 만큼 해줘도
아이들은 아직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늘 감사해 한다.

그 날 쇼핑의 하이라이트는 계란이었다. 이미 한판이 냉장고에 얌전히
있음에도 "한 판 990"이란 말에 혹해 계란 2판을 사고 말았다. 명시된
'1인당 1판'에 코웃음 날리며 남편도, 나도 1판씩 커트기에 담았다.
집에 운반 할 문제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싸다" 만 계산에 넣었다.
정상가격이 6400원이니 기껏 4400원 덕본 것에 흥분해 그날 무슨카드로
10만원 이상이면 15000원짜리 선물을 주었다. 한데 그걸 잊어버린 실수를
했으니 내가 과연 알뜰 주부하고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은 분명하다.

이런 실수는 그 다음 해괴하고 희한한 실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양계장이 된 우리 가정에 계란 요리가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후라이, 계란 삶기로 마구 소비해도 계란은 그대로 인 것 같았다.
그 다음날 넉넉히 삶아서 시어머니에게 인심좋은 며느리 노릇을 했다.
물론 용돈도 넣어 드렸으니 이리저리 따지면 손해(?)가 막심하다.

빨리 소비해야 부패하지 않을 것 같아서 또 다음날 계란을 삶아야 했다.
첫 번째는 무사히 잘 삶았는데..... 두 번째는 폭죽놀이 하는 줄 알았다.
일전에도 물 끓인다고 집 날릴 뻔 한 적이 있었는데 또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다행히 노란 냄비는 꺼무죽죽하게, 내용물 10개는 "구운 계란"
으로 내 의도와 다르게 변형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형편없는 건 버리고 다소 먹을 정도는 말끔히 씻어 그릇에 담았다.
저녁에 배가 출출한 남편이 이상하게 생긴 달걀를 보더니 내게 물었다.
"이 계란이 어떻게 된 거야?"
"응, 요즘 계란 굽어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해서 한번 시도해 봤어"
사실 남편은 깔끔하면 타의 추종 불허할 만큼 칼날같은 깔끔주의였다.
아침의 토스트, 저녁에 구운 오징어에 일부 탄 검은 부분조차 먹지 않는
스타일이라 탄 계란은 먹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그 희한한 먹거리의
주체가 남편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한국인들은 몸에 좋다하면 사그리먹어 치운다고 하는데, 역시 건강
운운하니까 먹혀 들어가는 모양이다. 만약 가정에 바퀴벌레로 골머리
앓는다면, 이것도 건강에 좋다고 저명한 분이 언급하기만 하면 일망타진
하는 건 시간 문제일 거다.

가끔 간식으로 밤과 계란, 고구마를 삶아 놓지만, 나는 그렇게 손대지
않는다. 처음 아이도 흥미보일 뿐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곤 한다.
이제 이번 계란 사건을 계기로 삶는 품목을 지향해야 될까 보다.
사람은 꼭 겪어봐야 깨닫게 되는지 이제 계란 삶기는 징그럽고 무섭다.
타버린 냄비 닦는데 팔 품과 아까운 물, 또 시간은 얼마나 들었나!
무엇보다 싸다고 덥석 사는 행위도 지양해야겠다. 무엇보다 간과 할 수
없는 일은, 조심하고 신경 써도 내 건망증이 당장 수그러들진 않겠지만
앞으로도 비슷한 실수가 일어나면 적당한 '거짓말' 로 땜질해야 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우연찮게 뱉은 거짓말, 악의 없는 멘트가 웬수같은 '탄 계란'을 건강에
좋은 보약으로 둔갑해 짐에 때론 즉흥적 거짓말도 양념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꼭 진실만이 최선이 아님을 우리는 주변에서 보지 않는가!
그런데 왜 예전에는 실수를 이런 잔꾀로 둘러 댈 생각을 못했는지....
의식하지 못한 것이 생의 태연함에 젖어 이제사 서서히 눈떠는 건가?
그래서 세월을 공짜로 먹는 사람은 없다고 어른들은 말하나보다.
나 역시 이제 조금씩 깨닫는 걸 보면 건조한 시간들을 헛수고로 보내지
않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앞으로 맞는 세월의 강물도 천연덕
스럽게 돌아서 보내고 고였다 보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