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생각1
우연히 맑스와 루소의 저작을 같이 읽게 되었는데,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 사적 재산의 소유에 있다고 강조한 점에서 둘의 사상은 유사하다. 루소의 저작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면, 맑스의 사상은 70년 후 레닌에 의한 러시아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루소는 불평등의 기원을 이론실험에 의해 추론했을 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 제시되어있지 않지만, 공산주의 선언에서는 폭력에의한 부르주아지 전복을 은연히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차이를 낳았는지도... 비약이겠지만.
역사가 진행함에따라 인류는 타락한다고 말한 점에서 루소는 당시 계몽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루소의 위대한 점은 대중과의 친근함에 있다. '인간을 철학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 철학자를 인간으로 만들면 된다' 라고 말했듯이, 너무 난해한 철학자들만의 사상은 대중을 계몽하기 어렵다. 결국 그 사상은 '그들만의 천국'의 초석일 뿐이다. 위대한 사상이 대중과 만날 때 역사는 새로 씌여진다.
독자생각2
장 자크 루소. 그의 이름을 어설프게나마 접한 것은 고등학교 사회 혹은 정치경제 시간이었으리라. 루소가 어쩌고, 로크가 어쩌고, 홉스가 어쩌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을 짝짓기 하며 외우고 있을 때 나는 그냥 이들의 이름과 저작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루소를 제대로 다시 접한 것은 대학 2학년 서양근대철학사 시간. 그러나 철학에서 루소는 칸트나 헤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대한 사상가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던지라 이때도 그저 어설프게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대학 4학년. 나는 루소의 정치철학에 대한 학사논문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의 저작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얇은 <에밀>을 읽고, 역시 동일 출판사에서 나온 문고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었다. 다음의 독서계획은 역시 그의 <사회계약론>이다. 책세상문고에서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이라는 그의 또다른 저서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싶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본래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은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면서 함께 언급했던 것인데 그 내용이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여 따로 떼어 다시 쓴 것이다. 고등학교 때 루소를 알고 있던 것은, 그가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견해에 맞서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선악의 개념을 모르고 있는 백지상태에 불과했고, 따라서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어느 순간부터 불평등해졌다. 그는 인간은 본래 자연상태에서 따로따로 행동하며 살았으나 이들이 함께 모여 집단을 구성하면서 그들간의 계급이 생겨났고 따라서 누구는 핍박받고 누구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불평등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예술과 학문, 문화가 발달해 사치가 극성을 이루고 이런 사치는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한번 악해진 다음에는 다시 선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18세기 당시에는 이러한 평등과 불평등의 관계를 따지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었고 루소의 생각은 지금 사회에서도 급진적이다. 그는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 라는 그룹에 속하는 볼테르, 디드로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 저작으로 인해 볼테르로부터 '거지철학'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루소가 볼테르로부터 이런 비판을 받았다는 대목은 그저 흘려버릴만한 대목이지만, 루소와 볼테르 둘 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볼테르의 <관용론>에도 나는 굉장한 매력을 느꼈고 그의 관용론이 현대 사회에, 우리나라에,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고,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타난 그의 생각 또한 지금에서 다시 되돌려볼만한 요소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은 네 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시민, 부르주아, 주민, 하층원주민이 그것이었는데, 루소는 최하층에 속하는 계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환경적 영향이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는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소는 사실 당대에도 이 저작으로 인해 대단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주목을 받았지 칭송을 받지는 못했다.
그가 칭송을 받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이루어진 뒤였다. 프랑스 혁명의 힘을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후에야 제대로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대개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사실 이 저작은 그다지 체계적이고 눈에 쏙 들어오는 글은 아니다. 번역자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 도입부에서 이 저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지만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선 <사회계약론>등에서 구체화되는 루소의 정치사상 체계의 서론적 성격을 갖는 저작이라 아직 체계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된다.
또한 저자의 난해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루소라는 이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고, 이 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제목 또한 들어봤을 법하다. 하지만 실제로 수많은 고전 중 이 책이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번역본의 부재도 그에 한몫을 했을 것이나 이번에 책사상문고에서 번역본이 나왔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독자생각3
가끔씩 건설 현장 인부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왜 불우하게 사는거지?" 문명이라는 이름아래 만들어진 수 많은 모순들. 루소가 고민했던 시대의 아픔을 약 200년 후의 우리도 벗어날 수는 없는가보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대우를 받아야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역사적으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루소가 살던 시대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일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살기가 힘들어지는 시대, 극소수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더욱 삶이 풍족해지는 시대였다. 분명 모순된 것인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이 현실에 대한 고뇌의 산물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아닐까.
이 책의 1부에서는 원시시대의 인간부터 언어의 발생등을 추적해 보고 2부에서는 문명의 발생과 더불어 인간이 어떻게 변화해가는 지를 추적해간다. 치밀한 구성과 상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원시시대의 인간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진정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
모순으로 가득찬 현실에 대해 한 번이라도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충분이 있다.
(^^핸드폰이란 놈을 보면서 문명이란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것이 없을 때는 없는대로 잘 살았는데 한 번 맛을 보고나면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것.") 책을 좋아라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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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1부의 결론부분
원시의 인간은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고,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쩌면 동류의 인간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그저 숲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정념의 지배를 받을 뿐 스스로 자족하면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감정과 지적 능력만을 갖고 있었다. 원시의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눈으로 보아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것만 쳐다보았다. 그의 지능은 그의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달하지 못했다.......
2부의 시작부분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 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출처 : --- 책의 p.93, 95 | |
독자생각4
대학학부때 읽어보려고 시도도 하지않았던 루소, 그를 처음 만나는 책이었다. 홉스와 로크 루소를비교해 가며 배웠던 고등학교 사회시간을 빼 놓고는 대학에서도 루소는 거론되지 않았다. 울 학교 서양정치사상사를 듣지 않은 내 잘못도 있?瑁嗤?,사상사 그 한과목을 제외하고는 당췌 이론을 공부하지 않은 울학교 정외인의 특징이기도 했다.(어설픈 변명이다--[;)
루소. 처음에는 읽기 어려웠는데 점점 빠져들었다. 그가 어떤사유를했는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빨려들어갔다.맑스를먼저 알았기에, 루소를 읽을수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맑스가 지적한 인간 사회의진보를 루소가 가장 먼저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인간의기원을 거듭거듭 올라가면서 문명인과 미개인을 설명하고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알아낸 루소.
그는 우리가 불평등해 진것이 사유재산이라고 명명한다. 그것은기술의 진보에 의해서 이루어 진것이며. 무엇보다 그것을 축적하고 사유했기 때문이라고., 자연인으로서 우리가 타고난 무한한 권리를 소유권으로 바꾸고. 자연인이 가지는 누구도 침범 할 수 없는 자유를 시민의자유로 바꿔버린 무지몽매한 민중들에게 루소는 외쳤다. 자유를 얻기 위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횡설수설하고 있는게 느껴지나...결국 그 책 에서 얻은 것은 의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으며 자연인으로서 우뚝 솟아있음이, 인간이 가장 자유로울 때라는 것,
물론, 기술의진보를 퇴보하자는 주장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독자생각5
18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것은 다름 아닌 자유, 평등주의 운동이었다. 나폴레옹을 필두로 한 운동의 흐름은 전 유럽에 널리 퍼졌으며, 이는 머지 않은 훗날 자본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운동의 시초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하지만 결코 현실화 되긴 어려운 진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어렵지 않게 우리는 그의 이름을 교과서에서 듣곤 했다. 장 자크 루소. 그 진실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보다는 천부인권설 등의 단어를 외우기에 급급했던 지난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일컫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사상에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혁신적이고도 혁명적인 부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는 디드로나 볼테르 등 루소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었던 이들로부터도 말도 안 되는 거지 철학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나로서는 굳이 루소에 대해 비판을 한다면, 그 내용 보다도 형식에 대한 것들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공상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예전과는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진보했다. 기존에 존재하던 신분제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변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루소가 살았던 시대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에는 자본의 소유 여부 혹은 소유 정도에 따른 또 다른 불평등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틀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불평등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루소의 본 책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책은 제네바 공화국 의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편견없이 받아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 이후에 1,2부로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다. 루소는 불평등을 신체적 불평등과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신체적 불평등은 나이, 건강, 체력 등에 있어서의 차이로 사회 안에서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도덕적/정치적 불평등은 타인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타인의 손해에 기초해서 생겨나는 일종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신체,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로 인하여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루소의 신체적 불평등 역시도 사회에서 용납되어진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루소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의 불평등에서는 논의 외적인 요소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는 미개인과 현 인류를 비교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미개인의 본능에 근거한 삶이 사회 전반적인 갈등을 야기하지 아니한다는 점에서 보다 더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듯 했다. 루소는 소유가 없는 곳에서는 바르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로크의 격언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루소에게 있어서 인간은 미개인과는 또 다른 존재였다. 그것은 인간이 이성, 즉 자기 발달의 가능성을 내포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인간은 다른 종의 동물들에 비해 약한 육체를 타고 났으나 머리를 쓸 줄 알았기에 일방적으로 자연에 순응하거나 도태되지 아니하며, 자연을 이용해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할 줄 아는 존재였다.
루소는 인간이 정신과 이성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해 서술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루소는 인간은 점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농업에 있어서 좀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각종 농기구를 만들고, 자신의 것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화폐를 만드는 과정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은 루소가 보았듯이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일정정도 한계를 지니고 있는 듯 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 비해 국가의 규모가 커진 당시 사회에 적용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은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국민들에게 중요한 법률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진 것이 아테네의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스파르타의 제도를 이상적인 제도로 칭송하고 있는 듯 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약간 의아했다.) 대신, 그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지혜로운 행정관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그 국가가 멸망치 않고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행정관들에게 위임된 국민의 권한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설명했다. 그는 아버지는 아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들의 주인일 수 있으나, 그 기간이 지난 후 아버지와 아들은 평등해진다고 보았다. 즉,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할 수는 있으나 일방적으로 복종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아동을 개별적인 주체로 인식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국가 권력, 즉 행정관이 국민들에게 절대적이지 아니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오늘날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이들이 진정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선거에 출마한 이들 중 국민 개개인의 마음에 드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선거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무효표를 던져야 하는가? 이는 선거가 지닌 하나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만약 루소가 오늘날의 정치를 본다면, 계속적으로 가중되는 불평등의 참혹함을 두고 그는 무엇이라고 할지 궁금하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생산성의 추구를 위해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속성을 모두 망각한 듯 하다. 평등에 대한 논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나마 존재하는 자유 역시도 소수의 부자들만을 위한 자유만이 인정된다. 특히 우리 사회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평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일종의 금기로 여겨졌다. 평등한 것은 좋은 것이다 라는 식의 추상적인 논의를 벗어나 구체적인 계급을 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폐쇄적인 체계 속에서 어쩌면 루소의 인간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혁명적, 진취적인 무언가로 남아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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