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 주었으면 .....채 맺어지지 않은 문장으로
"모순"의 양귀자씨는 독자들에게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풍요와 빈곤, 성공과 실패....
우리 사는 동안 이런 인생의 불가피한 모순들과
부딪히게 마련이다.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쳐본들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는
게 운명이듯 우린 어쩔 수 없이 이런 모순을
끌어안고 살고 있는 것
이다. 또 나와 무관하다고 이러한 이면(裏面)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작가는 스물 다섯 안진진이란
여성을 통해 여러 말을 던진다.
'인생은 탐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책을 덮는 시점에서는 인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사람처럼.....
소설은 전반적으로 짜 맞춘듯 작위적인 느낌이
풍김에도 그럼에도 충분
히 공감 가는 것은 어쩌면 나 역시 인생은 모순덩어리라고 늘 생각하며
지낸 건 아니였나 싶다. 작가의 당부
따라 다시 한번 천천히....
천.천.히 생각해본다. 인생의 행복.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하고.
먼저 책에서 만난 첫
번째 모순은 쌍둥이인 엄마와 이모의 삶이다.
결혼이라는 단 한번 선택으로 쌍둥이 자매지만 너무나 상반된 인생을 .
살아가는 것이다.
한쪽은 술주정뱅이 남편을 만나 일생을 고통 속에
허덕이고, 다른 쪽은 성공한 사업가의 아내로서 풍요와 품격의 삶을
엮어나간다. 또한
어른의 엇갈린 삶만큼 그들 자녀도 다른 인생을 살아
가는 모습도 동시에 비교해 준다. 하지만 누구나 끝까지 행복연주만
켜도록 놔두지
않는 모양이다. 즉 작가는 여기서 트릭을 쓴다. 바로
불가피한 모순이 도사리고 있음을, 어쩜 당연히 그래야 되는 필연처럼.
그래서
세상이 공평할 수 있도록 말이다.
주인공 안진진에게 행복의 모범교과서로 보여진 이모의 삶이 어느 날,
'나는 늘 지루했어.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라는 유서가 배달되면서
혼돈이 생긴다. 단 한번도 결핍을 겪어 본적 없던 이모 삶이 왜???
무덤속보다 더
평온했던 자기(이모) 삶보다 오히려 알콜 중독의 남편과
툭하면 주먹질로 파출소 가는 아들을 둔 엄마(언니) 삶이, 또 가끔 가출
하는
딸로 인해 고달픔의 연속인 언니 삶이 부러웠다는 이모의 유서.
종이 한장 남기고 주위의 부러움 시선을 이모는 걷어버린 버린
것이다.
이런 사태를 접하면서 독자는 이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평화로운
가정과 안정, 풍요 속에서 무엇 때문에? 삶이
지리멸렬하다는 이유로...
그렇다고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고귀한 생명을 접을 수 있을까.
일전에 아침마당이란 TV 프로에서
언급한 말이 생각난다.
답답한 상담자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 문제로 토론과 여러 사례를 접목
시켜 앞으로 나아갈 지침과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뭐 저런 문제로 공개적으로 왈가왈부할까 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하지만 당사자에겐 너무나
절박한 고통이기에, 생의 끈을 놓고 싶을 만큼
힘이 들기에 여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게 바로 삶의 다양성이듯 나와 무관한 일도
다른 이에겐 고통으로, 복잡한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이런 맥락에서 유추하면 모든 사람에게 행복해 보인 이모의 삶이 스스로
에게 한없는 불행이었고, 모든 이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엄마의 삶이 이모
에게는 행복해 보 일수 있다는 게 바로 모순이지만 능히 가능하지 않을지.
때론 풍요로운 물질을 구가하기 위해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사는 이에게는
한갓 배부른 투정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조금의 요동조
차 일어날 수 없는 평온함이
숨막힐 만큼의 고통이라면 이해가 될까......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모양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겪으면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 이모는 죽음
으로 진진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럼에도 진진이 택한
결혼상대자는
이모부 같은 사람, 정시에 출발하고 도착하는 기차처럼 자로 잰 듯 인생
을 완벽한 계획표에 따라 운행하는 전문직 샐러리맨
나영규를 택한다.
착하고 무능력한 김장우에게 특별한 사랑을 느껴보지만 사랑보다 안정을
택한 이유는 자신이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삶을
선택하기 위함이다.
비록 이모의 굴곡 없는 무미건조함의 결과가 어떤지를 깨달을지라도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 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예컨대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이 발전 될 것이라고 주인공은
믿는다. 이것이 요즘 젊은이다운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까...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모순...
안진진이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에 대한 관대함이다. 이모의 행복이
반듯한 이모부와 맺어졌기에 가능한 것이라면 반대로 자기
엄마 불행은
가난과 술로 일삼은 아버지로 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족을 방기하고
폭력으로 피난가게 만든 일, 거지차림으로 일몰 때
나타난 아버지를
쉽게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마치 엄마의 불행과 아무 관계없다는
듯이 오히려 낭만적인 기질로 미화시켜주는 대목은
꽤나 아이러니다.
흔히 아들은 엄마를 감싸고 딸은 밉던 곱던 아버지를 옹호한다고 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싸움에
두말할 것도 없이 아빠 편에 서서
엄마가 해도해도 지나치다고 일방적으로 곱지 않은 심사를 드러냈다.
아직도 뭐가 옳고 그름이 불분명한
시절임에도 붉그락 푸르락 아빠 얼굴
에 뽀뽀 퍼붓면서 딸은 당신의 아군임을 알려주었다. 이 책에서도 딸은
성장 과정 내내 무능과
고통만 준 아빠에게 일방적인 연민을 품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해석해 본다. 그래도 여전히 쉽게 해독되지 않는 영어문처럼
내겐
아리송하긴 하다.
또 하나.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말년을 보여준 아버지의 모습이다.
한창 젊은 시절은 자유로운 방랑자로 세월을
갉아먹고 늙어서 기력이
떨어질 쯤 중풍과 치매에 걸려 귀향하는 아버지....그럼에도 냉정히
나 몰라라가 아닌 옛 시대의 우리
어머니처럼 묵묵히 받아드리는 엄마.
언제나 온갖 뒤치다꺼리로 거대한 불행이 늘 도사리고 있는 와중에
씽씽 바람 휘날리며 사는 엄마의
활기찬 모습이.....이상하게 어울리지
않으면서 어울리는 것 또한 이 소설만이 가지는 모순점이리라.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하는 게 숙명인지도 모른다..
다시금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해 보며 이 책을 가지런히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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