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고백
살아가다가 강하게 마음을 흔들어 주는 사람, 비록 불행한 일이 맞을지
라도 저 사람과 함께라면 충분히 이겨 낼 것 같은 이와의 사랑.
이처럼 전율과 강한 끌림을 주는 사랑 앞에 진정한 용기를 내야 함에도
우린 안타까움만 간직한 채 가슴앓이 하듯 힘겨운 사랑을 할 때가 있다
사랑의 고백,
고고한 울음을 터뜨리며 이 세상에 나와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열병 앓듯
열정적 사랑을 무릎 끓는 심정으로 가슴 조이며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무지개 하나쯤 걸어 두는 일이 아닐까?
다가가기엔 두렵고 멀게만 느껴지고 멀리 있으면 그리워지는 사랑.......
사랑 감정을 혼자 다스리는 짝사랑의 증세가 한국인에게 많은 것 같다.
사랑의 감정은 은밀한 것이라 빈 가슴 귀퉁이에 꼭꼭 눌러두고 가능한 한
억눌러서 남에게 들키지 않게 해야 된다고 믿기 때문일까.
'I love you' 이런 말 자체가 서양적인 냄새가 나서일까.. 더욱 여성측이
먼저 사랑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 정서 상 걸맞지 않다고 생각들 한다.
이래서 짝사랑의 외기러기 여성은 순진하다 못해 우둔하게, 때론 지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내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영화를 통해 자신의 짝사랑을 펼치는 여자와 사랑에 도(道) 튼,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의 그림 같은 10간의 사랑이야기를 잠시 훔쳐봤다.
너무나 다른 가치관, 성격, 생활방식, 사랑 법까지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어가는 이야기....미술관 옆 동물원.
이 영화는 내게 신기함을 두 가지 던져 주었다
하나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공원이 함께 병존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제목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기발한
아이디어라 신선하게, 정감 있게 다가왔다.
다른 하나는 여 주인공의 이름이 나와 똑같은데 묘한 매력이 생겼다는 점.
'춘희야~ '하고 부르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내 눈이 더 크게 떠지곤 했다.
아마 등장 인물이름으로 많이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새삼스레 불리
여지는 춘희라는 친숙한 이름이 나름대로 반가웠던 모양이다.
이런 점이 작용한 건지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에는 사실 흥미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기대 이상으로 물빛하늘을 보듯 깨끗함을 맛본 영화였다.
팽팽한 피부의 탄력이 냉정한 시간이 갈수록 마치 소금 먹은 배추 잎사귀
처럼 풀죽어 버린 어느 날, 무심한 세월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내게도
적용이 되었다. 이제 중년에 든 나도 연륜(年輪)을 무시할 수 없는지..
중년의 시점(時點)에는 역시 완숙한 사랑이야기가 훨씬 감칠맛 나고 조금은
자극적인 게 허구의 영화지만 현실로 착각할 만큼 구미가 당기곤 했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를 수용하지 않으려 발버둥쳐봐도 말짱 도루묵인 것을..
이 영화는 현실에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억지로 꿰어 맞춘 무리한 설정이
눈에 띔에도 섬세함과 투명한 전개로 어색함을 충분히 메워 주었다. 춘희는
짝사랑만 하는 여자이고 철수는 막 여자친구에게 차인 남자로 등장한다.
이미 이사가고 없는 여자 친구의 집에 대신 살고 있는 춘희와 우연히 함께
살게 되는 철수와의 무리한 설정. 영화 속 영화라는 독특한 액자식 전개 등
마치 한 폭의 자연 풍경을 화사하게 그린 수채화 같은 영화였다.
비 올 때 차 지나가는 소리, 그때 스탠드 켜고 방에 있으면 부자가 된 느낌,
때 밀면서 목욕하고 나면 든든하다는 주인공 춘희라는 덜렁이....
얼굴이 예쁘면 미운 행동도 예쁘다고 했던가.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지저분하고
게을러 터져 둔하다 못해 멍청함을 표현해 주는데 화장기 없는 깨끗한 용모
때문에 오히려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비친다.
혼자서 부끄러운 짝사랑을 하는 춘희는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그려
가고 있다. 우연히 기거하게 되는 철수와의 만남에서 둘은 공모전에 보낼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 한다. 그 과정에 티격태격 다투면서 알게 모르게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서로에게 길들여지게 된다. 그들은 자기가 설정한 시나리오
속의 인물로 닮아가고 있었고 조금씩 서로를 배려와 이해를 하기에 이른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한다. 조금씩 배워나가면서 익숙해
지고 그리고 차츰차츰 다가서며 서서히 길들여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게 그냥 풍덩 빠지는 줄 알았지,.이렇게 서서히 물들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어." 사랑이 젖어 든다는 것, 스며든다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고 그의
진심을 알아주고 본질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쇼윈도의 새 구두를 보면서 춘희가 초라한 말을 토한다. 예쁜 신발을 보며
이제 자신이 신고 있는 것이 촌스러워 보인다고....."자기 발에 익숙해져있는
것은 왠지 촌스러워 보이고, 신고 있어서 그 존재를 못 느끼기 때문이야."
다가 설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갈수록 커져만 가듯이...철수는
춘희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사가 있다. 참으로 멋지지 않는가.
이 아름답고 동화 같은 대사로 인해 이 영화는 충분히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세웠지 않을까. 흔히 한국영화의 사랑테마가 통속적이고 앤딩 스토리가
뻔하다고, 싸구려 취급에 인색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런 편견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며 여성감독의 섬세한 감성을 살린 수작이 아닐까 한다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산뜻한 미소 흘리게 만드는 깔끔한 수작(秀作)
차츰 차츰 서로에게 물 들어가는 사랑 방식은 얼마나 예쁜지...
병째로 물 마시는 버릇을 컵을 이용하게 만들고, 양말 세탁하기 귀찮다고
맨발로 다니던 것을 양말 신게 할 만큼, 처음엔 미술관을 고집했던 여자,
반대로 동물원을 고집했던 남자 그들이 나중엔 상대방이 좋아하는 장소를
찾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물 들어가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끝내 둘 모두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수줍은 키스로 고백을 대신한
마지막 씬은 참으로 가슴 아로새길 만큼 풋풋한 이미지를 던져 준다
그 사랑이 성공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사랑이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자신에게 정확한 진실일 때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 고백하는 일은 진정
아름답지 않을까???
사랑의 고백,
사랑의 확신이 서야 할 수 있는 고백을 마음으로만 가지고 앓다가 엇갈리는
운명의 흐름에 살아가는 유교적 인연설로 결론 내리면 너무 인생이 아깝지
않겠는가.......우리 아름다운 감정에 인색하지 말도록 하자.
그렇다고 너무 헤픈 것도 곤란하지만....
Early in the morning - Cliff Richard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 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인 줄은 몰랐어.
『미술관 옆 동물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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