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상치 못한 일로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받을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맡을 수 있는 향기는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 호기심과
편한 미소를 띄울 만큼 기분 좋은 향기도 별로 없을 거라 여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삶의 향기가 아닐까 싶다.
강산이 변할 만큼 주부노릇을 했지만 여전히 요리에는 자신이 없다.
하긴 뭐든 만들려고 노력과 작심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도대체
부엌에 들어가 지지고 볶아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초보시절이나 경력 붙은 지금도 음식솜씨에는 전혀
관록이 붙지 않는다. 다행이 가족들 모두 밥보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기에 나의 어설픈 솜씨는 크게 불편하지 않다. 어떤 날은
인스턴트 라면이 주식이 되기도 했으니까....
손끝에서 음식 맛이 난다고, 이것도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이다.
누구든 내 특이한 손톱, 일명 뱀손이라 부르는 손을 보면 음식과
재주가 많다고 입을 모으지만 예외도 있어 내가 해당이 된다.
뭐든 해 보겠다는 시도는 탁월하다. 까짓 것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은 있어서 맛보다 하려는 성의를 난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하지만 결과는 '평소대로 얌전한 행동이 주변을 기쁘게 하는 것'
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휴일 날 가족에게 특별요리라도 할라치면
모두들 결사반대다. 누구 잡으려고, 또 강제로 먹어라 하지말고
그냥 있는 반찬으로 적당히 먹자고 들 한다. 사실 솜씨없는 이가
부엌에 들어가면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솜씨를
뽐내 보겠다고 낑낑대어 본다. 그렇다고 사전 준비작업을 하는가
하면 전혀 하지 않는다. 내 책꽂이에는 요리 책이 서너 권 꼽혀
있고 레시피도 적잖게 모아 두었지만 제대로 본적이 없다. 어떤 날은
인터넷 '쿡 사이트'에 들어가 식단도 체크해 보지만 나랑 어울리지
않아 그냥 페이지만 넘기고 만다. 근본적으로 음식에 흥미가 없다.
이런 형편에 세월 따라 연륜 붙는 것 마냥 내 솜씨도 일취월장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사정은 반대다. 특히 보글보글 끓고 풍기는 냄새는
그럴싸한데 문제는 맛이 산뜻하지 못함이 나를 슬프게 한다. 이럴 때
애꿎은 양념들이(넣지 말아야 할 것) 총 동원되지만 그러다 보니 늘
국적불명의 요리가 되고 더 이상 "요리" 하겠다는 나의 말에 즉각적
반응 "참아주세요" 라는 주문만 무성하다. 그럼에도 큰 녀석은
'오늘 메뉴는 뭐냐고'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을 해댄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꼽자면 가족 모두 우량품(?)이라는 사실이다.
허구한 날 햄버그, 라면, 통닭 등 소위 인스턴트 미식가들이라 당연
통통하게 오른 살이 장난 아니다. 아빠와 막내는 얼마 후면 비만센타
에서 멋진 초대장이 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배 살이 심각하다. 단단한
살을 만지면서 오히려 내 솜씨가 출중하지 않음이 가족건강을 위해
다행이라 위로 삼는다....하하하 여기에다 빵파티 마저 밤 행사처럼
치르곤 했으니 비만을 부채질한 장본인이 누군지 알만하다. 이와 같은
작태가 가족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주부라 할 수 있는지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런데 나에게도 서광이 비치는 날이 도래한 것이다. 이른바 내 솜
씨에 희망이 없단 사실을 오래 전에 인정한 남편이 저녁을 책임진
다는 소리를 한다. 외식이구나 여긴 순간 '오늘은 아빠가 요리사"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한 깔끔에 완벽주의 남편은 간단한 라면을 끓
일지라도 뭐든 정식으로 한다. 물 끓어 라면과 스프를 넣는 것이 아닌,
김치 팍팍 파도 쏭쏭 썰어 넣고 나중에 계란을 풀어 보기 좋은 상태에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까지 곁들어 내 온다. 내가 남자하고 남편이
여자로 살림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한번씩 해보는 순간이다.
워낙 라면과 국수를 잘 먹는 편이라 며칠 전부터 '라국수' 요리운운을
했었다. 어떤 곳에서 먹어보니 참 맛있었다고 한번 해 볼래 묻고는
금방 고개 절래절래 흔든다. 공연히 해 본 말이라고 어색한 입막음을
그려 보였다. 내 솜씨를 아니까.......근데 그 요리를 당장 해 보인다는
것이다. 부엌에는 일절 출입금지라고 외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날마다
들어가는 주방에 뭐 들어가고 싶을까. 난 맨날 안 들어가고 싶다고.....
나처럼 오랜 시간 소비하지 않고 주방에서 떨거덕거린 남편은 요리를
금방 해왔다. 원래 빈깡통이 요란하다고 잘 하지 못하면서 준비하느라
허둥대고 가끔 불에 데여 비명도 노래 삼아 질러대는 나와 달리, 남편은
뜨거운 냄비를 침착하게 들고 4개의 그릇에 라국수를 담아 왔다. 평소
해오던 솜씨처럼. 무엇보다 코끝에 감기는 냄새가 죽이는 것이다.
김치까지 먹음직스레 걸터앉아 있기에 맛보지 않아도 일류요리처럼
입맛을 돌게 했다. 진정한 요리는 맛도 맛이지만 시각적 효과도 무시
하지 못한다 하지 않던가!
참으로 맛이 있었다. 이건 나 뿐 아니라 아이들 모두 합세해서 음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그릇의 내용물을 국물조차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운 것이다. 정작 준비해준 남편은 가족에게 한껏 들어주느라 자기
양대로 먹지 못하고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헤프닝이 일어났다. 참
맛있다고 칭찬하면서 어떻게 만든 거냐고 얌전히 받아먹은 입장에서
물어보았다. 라면과 국수를 한꺼번에 넣는지 아닌지 고민이 되었지만
국수가 빨리 퍼지는 성질 때문에 나중에 넣었던 점과 김치를 넣어 개운
하게 만든 것이 맛이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마치 요리강사처럼
자신있게 가르쳐 준다. 아무 소용없는 사람에게......
푸짐하게 먹은 아이들은 어미가 하고픈 말을 대신해 주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앞으로 아빠가 종종 요리해.' 주문을 하는 것이다
막내가 엄지손가락을 내세우며 최고라는 음식 평에 고무된 남편은
앞으로 무를 채 썰어 무치고 또 다른 음식에도 도전해 볼 작정
이라는 말도 곁들인다. 바야흐로 이제야 내 팔자가 활짝 피려는 모양
이다 라고 생각하니 음식으로 느낀 포만감 보다 한마디 말속에 진짜
배가 불룩해져 왔다.
시작이 반이라고 그동안 틈틈이 라면으로 야식을 선보였던 남편이
이제 정식으로 선보이는 날도 머지 않을 것 같다. 만약 내가 음식을
잘했다면 남편의 솜씨를 체험 할 기회가 종종 있었을까? 또 음식에
소질이 있음도 몰랐을 것이다. 바른 생활만 하는 남편의 행동거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한 미소를 제공하기도 한다. 옛말에 음식 잘하면
소박맞지 않는다 했지만, 대신 부엌에 머무는 시간과 요리하랴 손에
물 마를 날 없으니 일복 많은 재주꾼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나처럼 음식 못해도 소박 맞지 않으니 지금 생각하면 세월을 잘 타고
났음도 있겠지만 음식 못하는 것도 내 복(福)의 일부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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