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허드렛일에 묻혀 꽉찬 가을농도를 망각했다. 매스컴은 날마다
화려해진 단풍을 보여주었지만 가을 정취에 풍덩 빠지는 걸
미루었다.
두어 시간 야트막한 등산로를 찾으면 화면 속 풍경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늘 차일피일 미루다 가을이 성큼
지나가는 느낌이다.
벼를 벤 누런 가을이 엎드리기 전에 원색 뜨개질 옷 입힌 단풍과 낙엽
운치 보태고 싶은 조바심에 밖으로 나서고
싶다. 더 이상 늦추면 급히
쫓아오는 초겨울 원망을 감당 못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간만에 보는 청명한 날씨 탓인지 무덤덤한
남편이 소풍을 가자한다.
이심전심이 오늘따라 통했는 모양이다. 교통 막히는 먼 곳보다 주변
가까운 곳으로 나서잔다. 여느 휴일처럼
보내겠거니 여긴 내 추측이
빗나감에 아이 못지 않는 반가움이 내 얼굴에 번진다. 게다가 모든 준
비는 남정네가 알아서 챙긴다고 홍일점
여성은 몸단장 하란다. 역시
조용히 갇혀 보내는 일상보다 걸음 옮기며 바깥바람 쐬는 행동이 좋다.
나들이 나가는 것은 아이 어른할것
없이 열린 마음과 긍정적 밝은 표정을
가져다 주어서 좋다.
김밥, 족발, 순대, 통닭, 과자, 음료수. 챙겨온 메뉴로 분식점을
차려도
될 만큼 남자들은 푸짐히 준비했다. 먹지 않아도 그저 도심을 벗어나
푸른 산허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생긴다. 천국계단
만큼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탑산으로 향했다. 이곳은 선열(先烈)을 기리는 충혼탑
이 우뚝 서 있고, 오붓한 산책로와 곳곳에 운동을
도와주는 휴식공간도
여러 군데 있다. 중간중간 마련된 벤치에는 가족, 연인의 알콩달콩한 모습
그리고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늦게 온 우리는 먹기 위해 이곳을 찾은 냥 챙겨온 것을 풀기 바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높은 계단을
오르고 보니 단풍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요즘 날마다 운동으로 몸을 단련시켜 걸음에
자신만만한 나조차도 힘에 겨워
헥헥대는 마당인데 사고 후유증으로 다리
가 불편한 남편과 아이에겐 오죽하랴 싶다. 또 냄새 풍기는 통닭은 아이
미각을 좀 자극
했을까, 더군다나 맛을 떠나 야외 나오면 뭐든 맛나지
않는가. 하물며 배 가죽이 딱 붙을 만큼 배가 고픈데....허급지급 숨
가쁘게
먹던 아이도 작은 배가 두둑해지니 비로소 뛰어다닐 생각을 한다.
나 역시 아이처럼 꾸역꾸역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젠 움직이는게
힘들다.
가뿐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억지로 천국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 보았다.
그때 특이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한 남자분이 잔디
혹은 평지에 흩어진
자갈을 주워 난간 옆 자갈 있는 곳에 던지는 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았
는데 몇번이나 그러는 것이다. 급기야는
땀을 닦는 손수건에 자갈을 담아
제자리에 던지지 않는가!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 통행에 불편을 주고,
주변 지저분한 것을
정리하자는 차원에서 그분은 무언의 행동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나와 남편은 그분에게 감탄의 눈빛
보내는데 일치했다.
세상에나.....요즘에도 음지에서 저런 분이 계시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에 비해 우린 어떠했나. 앵두같은 열매를
잔뜩 따다 누가 멀리 던지나
아이와 내기를 했고 어미는 '이렇게 하라고' 시범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이런 행동 말리는 남편에게 점잖게
굴면 누가 상주나 하고 오히려 핀잔을
주지 않았던가. 실로 아이보다 어미가 한술 뜨며 방방 거렸으니
부끄럽기
짝이없다.
그 아저씨가 그 행동 보이지 않았다면 철부지처럼 희희낙낙 가위바위보,
자갈, 앵두 멀리 던지기, 등을
했으리라. 그리고 모아진 쓰레기도 그냥
방치하고 왔을 것이다 근데 사소한 그 행동에 감탄한 우리는 예전 습관
처럼 굴어선 안될 것
같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선행 하는 그
아저씨에게 갑자기 뭔가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다. 그제서야 우리에게 남겨
진
먹거리가 생각 났다. 맛나는 초코렛을 드렸다. 당연히 사양하는 것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 골리듯 아주 맛있다고 얘기를 덧붙이니 그제서야
수
줍게 받는다.
그 동안 얌체 행동 보이는 나와 같은 이가 있는 반면 저렇게 음지에서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때문에 이런 휴식 공간에서 편히 쉴수
있는 것이다. 같은 어른임에도 어른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선행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관여하기 싫다고,
방관이 최선이라고 우린 자기 행동에 온갖 구실과 변명을 붙이며 외면에
익숙해
있다.
어른된 도리를 행사해야 될 일에도 망설이며 선뜻 하기 힘들어 한다.
그 중에 하나인 청소년 선도에도 귀찮은 냥 무관심을
가장한다.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는 우리 앞에 청소년들이 짝을 지어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충혼탑 단에 떠들고 있었다. 우리는 눈살만
찌푸릴 뿐 달리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드신 아저씨가 운동하고 난 후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청소년의 작태가 못내 마땅찮은지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것 보면 역시
나이는 공짜로 먹지 않는 것 같다.
너희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아이 불러와라고 소리 내자
조금 후 멀대같은
큰 아이가 아저씨 앞에 나타났다.
"이곳이 너희들 떠드는 곳인냐, 어떠한 곳인지 말해 봐라" 그러자
그 학생은
기본적 알고 있는 상식을 주절거린다. 나라 위해 목숨받친 선열
어쩌구 저쩌구 머리로 깨우친 단어만, 가슴으로 모르는 말만 외워
댄다.
그런 곳에서 잡담해서 되느냐고, 다른 곳에 가서 놀아라고 씩씩하게 학생
들을 타일렀다. 설득력이 있었는지 키 큰 아이의 말에
따라 그 무리들은
가방을 챙겨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네들이 머물던 자리에 뒹굴던 휴지
조각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그 어른은 다시 학생에게 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음을 던진다.
그러자 그 학생 왈 "제가 안
버렸는데요?"
지켜보고 있던 우리 부부는 똑같이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우리 큰 아이 말투와 하나도 틀리지 않고 같게 흉내내는 것이
신기했다.
누군가가 하면 편함에도 꼭 자기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심리가 요즘 아이
에겐 자리잡혀 있나보다. 난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답답하고
속이 뒤틀려 이기주의에 인정머리 없는 큰 아이에게 실망한다.
색다른 꺼리를 기대한 나들이는 아니였지만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회복
시켜주는 값진 소풍이 되었다. 소시민의 작은 행동 하나가, 나이 드신 어른의
일침 한 마디가 무심한
방관자로 지내려는 내 행동과 쓰레기를 방치해도
된다는 실종된 내 양심을 자극시켜 반듯하게 되돌려 놓는다. 결국 집까지
쓰레기를 갖고
왔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값진 교훈은 어떤 특별한 교육도
가능 하겠지만 우연히 보고 체험한 것에서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끔씩 부모님의 인생을 평가하듯이 나의 자녀도 언젠가
지금의 내모습을 평가하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 이제 얼마 후 자녀가
나를 평가할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을수 있으니 지금의 순간을 무심히 내 편리
위주로 적당히 살아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