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밤 풍경이 신선하다. 비가 내려 습기 잔뜩 머금은 밤은 넉넉하게
깔린 제 그림자를 밟으며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간간이 눈에 띄는
가을전령사들이 가을 소식을 곱게 전해주지만 여전히 기승 부린 더위로
인해 새벽이나 한 밤의 소슬한 기운만이 가을임을
깨닫는다.
자루에 담아와서 와르르 쏟아 놓은 것 같은 한 낮의 인파 움직임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마알갛게 씻긴 햇살도 온데
간데 없어졌다. 비어 있는
거리에는 넘치는 고독만이 태초의 밤을 만들고 있다. 한 뭉치 쓰레기들은
제 집 인 냥 구석구석 진을 치고
있고, 가느다란 빛 사이로 인간의 낡은
양심도 흔적을 남기며 서 있다
무의식의 습관처럼 하루동안 흩트려진 내 삶의 편린과
잡동사니를 주워
담는다. 더 이상 효용가치 불분명한 것은 가차없이 버리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다. 그리곤 밤 풍경에 에워싸여 숨쉬고
있는 거리를 나섰다. 어느
순간 정적에 휘둘린 밤을 한껏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 이가 보였다.
새벽시장을 준비하기 위한 상인의 분주한
몸놀림인 것이다.
비 온 뒤끝이라 땅바닥도 여의치 않은 여건임에도 준비한 각종 먹거리를
선보이기 위해 그들은 일지감치 옹기종기
자리 깔고 있는 중이다. 이 한밤
에 누가 온다고 벌써부터? 새벽이 되려면 아직 한참을 별을 헤며, 달님과
벗해야 하지 않을까?
그때부터 물음표를 붙인 의문은 꼬리를 물며 쉴새없이
내 머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지금쯤 정상적인 리듬을 탄다면 안온한 잠자리
에서
지친 하루의 피로를 풀 때가 아닌가 말이다.
안타까움 반 궁금증 반을 갖고 그들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고 싶어졌다.
마침
엉성하게 풀고 있던 좌판 손놀림을 멈추고 낯선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아마 첫 손님인 줄 아는지 개시한다고 까만 어둠과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
만은 하얀 생기를 띄웠다. 역동하는 물고기의 팔팔한 힘처럼.
그들의 기대를 싹둑 자르기엔 나의 호기심이 너무 철없다는 생각이
스치자
일단 손님을 가장한 채 자잘한 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펼쳐 보였다.
인적 뜸한 시간대의 손님이기에 낮 시장보다 값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어떡하든 개시하기 위해 비싸다고 꼬리 달지 않는 내게 상인은 깎아주는
성의까지 보였다. '싱싱하다' 이제 방금
해온 물건임을 여러 번 강조하며
상품을 나에게 안기려고 안간힘을 써댄다. 진짜 돈만 손에 들고 있으면
사 주고 싶은 유혹을 갖게
한다.
주부들 중 일부는 값싸다는 느낌에 필요치 않는 것이라도 일단 구입한다.
비록 그 물건이 집에 있을지라도 다시 싸게
준다고 하면 그 유혹에 넘어간
경험도 있을 법하다. 알뜰한 주부들은 이것을 가계의 지혜로 돌리겠지만
별로 경제적이지 못한 나는 그저
값싸다는 것에 혹해 대책 없이 구매 한
적이 부끄럽지만 많다. 옆에서 지켜본 남편이 말리지 않음 내가 장사꾼으로
나서도 될 만큼
쓸데없는 욕심을 부린다.
'당신 같은 사람만 있으면 장사꾼들도 장사할 만 하겠다' 고 눈 시리게
보던 남편이 가끔 한마디한다.
팔기 위해 그럴싸하게 꾸민 장사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내가 답답한 것이다. 싸게 싼 물건을 남편의 손에 더 이상
들 수 없을 만큼
안겨 주고, 난 마치 부자가 된 것처럼 흐뭇하기만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살림과 수판에 어두운 여성이 바로
나다...
우리말에 싼 게 비지떡이라고 싸게 싼 것은 역시 싸구려 대접을 받는다.
즉시 손질 받지 못한 것들은 천박꾸러기가 되어
제대로 맛도, 빛도 내지
못하고 쓰레기가 된 것이 많다. 그럼에도 내가 또순이가 된 냥 폼을 잡
았으니...... 이제는 제법
생활인이 되어 값싼 것에 그리 현혹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달콤한 유혹을 칼같이 단호하게 자르지 못한다.
장사꾼의 '방금
밭에서 캐온 것' 이런 솔깃한 음성을 뒷전으로 하고 왜
이렇게 밤에 물건을 펼치느냐고 결국 내가 궁금한 점을 묻기에 이르렀다.
다소
자기입담이 빛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젖은 상인은 실망한 소리로
미리 목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함이라는 짧은 설명을 붙여준다. 새벽을
여는
사람의 취재를 하는 냥 난 그들의 속 내막이 더욱 궁금해졌다. 어디서 왔
느냐, 물건은 직접 촌에서 생산한 것이냐, 잠은 어디서
자느냐고 물었다.
구입과 상관없는 질문들을 해대는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뻔뻔했을까....
물건을 사지 않은 내게 짜증을 낼 수
있음에도 다음 고객으로 만들려고
애써 내 질문에 답한다. 2 시간 정도 촌에서 온 사람도, 중간 상인들도
있다. 잠은 대체로 거리
좌판에서 세울 때가 많으며, 트럭 갖고 온 사람은
트럭에서 잔다고 충실히 답을 해 주는 것이다. 청문회 출석하는 사람도
여기 와서
이네들의 꾸밈없는 말을 경청한다면 성의 없는 답변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개가 그 순간 떠오는 것은
왜
일까?
그들의 대답을 듣고 아기자기 전시해 놓은 물건가격을 어림짐작해 보건대,
눈대중으로도 많은 돈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 돈을 벌기 위해 가족
과의 잠도 뒤로 미루고, 새벽이슬 맞으며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구나 생각
하니 공연히 내가
부끄러워진다. 사람마다 삶의 방정식이 다양하듯 그들은
이것이 최선일수 도 있고, 나 역시 내가 택한 방식이 최우선이기도 하다.
그래도
왠지 자꾸 부끄러워지는 마음 숨길 수 없으니 베짱이와 비슷한 내
게으름 때문에 더욱 그들에게 미안 감이 들지는
않았을까.
길거리 좌판을 벌이고 있는 촌부나 할머니가 펼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많게는 몇 만원, 약 1-2만원 미만을 걸고
한 낮을 메우는 것을 본다.
남편은 특히 연로하신 할머니의 물건들을 챙겨오는 편인데, 나처럼 싼 맛이
아닌 단지 그들의 희망과 그늘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사들고 온다.
그 예전 당신 어머님이 새벽 십리 길을 직접 일군 먹거리를 머리에 이고
장에 파신 것을 염두에
두며 볼품 없는 물건일망정 무리하게 챙겨왔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는 백수건달처럼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들처럼 생활의
도움과 새벽 장을 위해, 아님 소일거리 삼아 온 밤을 다
투자하며 열심히 사는 내 이웃도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쓰레기를
비우러 왔다가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은 냥 내 삶을 되돌아본다.
아직 인생을 정리할 단계는 아닐지라도 지나온 과정을 되 짚어보니
이제껏
새벽 일찍 일어나 무엇을 해야할 만큼의 운명에 맞닥뜨리지 않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껴본다. 이 고마움을 두고두고 느끼며 열심히
살아야겠는데....
무심히 떠도는 일상을 보내다보면 언제 그런 마음을 다졌냐고 쉽게 잊어
버리는 내 간사한 마음이 염려되기만
하다.
|
'삶의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잔한 파문 (0) | 2001.10.06 |
---|---|
적당히 눈감아 주며 살자 (0) | 2001.09.30 |
모교 사랑의 인연 (0) | 2001.09.26 |
열정 (0) | 2001.09.24 |
왠수도 있는 게 낫다 (0) | 2001.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