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느냐가 문제이지
상대가 잘나고 좋은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든 일단 사랑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무조건 상대방을 인정하게 된다.
상대가 못났든 나쁜 사람이든 간에.
사랑하는 연인들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두사람만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담합이다.
각박한 환경 속에서 두사람만이 쌓아 올리는 아성.
이 아득한 거리감이 연인들을 취하게 만든다.
그토록 쌀쌀맞던 타인이었던 그 사람이
이렇게 나에 대해 감탄하며 내 곁에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사랑하는 남녀는 무조건 상대방을 인정한다.
도파민의 도취 상태가 현실 감각을 차단해 버리고
현실과 안전거리가 유지되면 그때 상대를 무한히 미화할 수 있다.
결점까지도 매력으로 미화되는 상대에 대해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 노예라도 될 듯한 헌신적인 마음이 된다.
이때 외부 환경에서 오는 긴장과 외로움으로 움츠러들기만 했던 마음을
이렇게 풍요롭게 만든 사랑의 힘에 연인들은 또다시 감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남녀간의 배타적인 사랑은
헌신하되 지배하지 않는 성인(聖人)의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하는 남녀의 헌신은 사실 서로를 지배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대신 절대적으로 지배한다는 전략이다.
상대의 전 존재를 붙잡아서 나를 인정하는데 몰입하도록 하려는 저의가
바로 열렬한 헌신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취 상태가 계속되는 한
상대를 지배하려는 불순한 저의나 전략은
어떠한 헌신이라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랑의 열정에 가려져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헌신의 감정이 영원하리라 믿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결혼 뒤에 일어난다.
살면서 점차 이런 열정적인 사랑에 한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도파민의 생성기간이 끝나면 그 뜨겁던 사랑도 식고 만다.
이때부터 현실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긴장 시킨다.
현실에 에워싸인 연인들은 도취상태에서 깨어나
현실의 요구를 처리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긴장과 자기 단련을 요구하는 현실 앞에 서면
그동안의 사랑의 담합은 거추장스런 질곡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전에 우리를 취하게 만들었던 현실과 배타적 담합 사이의 바로 그 거리가
이제는 우리를 초조하게 만든다.
헌신 행위 자체보다 그 뒤에 나를 지배하려는 상대의 저의가 먼저 보인다.
상대가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왠지 달아나고 싶어진다.
여태까지 열렬한 감탄의 대상이던 사람이
이제는 극히 별 느낌도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져 있는 것이다.
진작 미혼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두 연인은 자신들 앞날의 불길한 징조를 예감하고
아마 그쯤에서 헤어져 쉽게 예전의 독립된 개인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첫사랑이 헤어지는 대부분의 이유가 아니겠는가.
첫사랑은 대부분 결혼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부부가 된 경우에는
그들을 도취시키는 사랑의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도
다시 예전의 독립된 개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도취에서 깨어난 부부에게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두 사람을 서로가 독립된 개인으로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 꽁꽁 묶어 버리는 ‘가정’이란 틀이다.
여성은 우선 주부가 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남성은 우선 가장이 되어 밖에 나가 활동을 하고 돈을 벌어와야 한다.
이런 역할 분담은 결혼한 남녀를 서로 상호 보완적인 의존관계 속에 몰아 넣는다.
사회 현실과의 소통이 막히고 경제적 독립의 기회를 잃어버린 주부는
계속 남편에게 헌신하며 사랑에 집착하려 할 것이고,
사회 현실을 헤쳐 가야 하는 남편은 가정에서의 아내의 헌신만 취하되,
열정없는 사랑은 귀찮고 번거로와 외면하려 들 것이다.
일부일처제의 가정은
사랑과 성욕 사이에 마구 방황하는 젊은 남녀들을
가정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수렴시키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긴 하지만,
이 장치로는 결혼 후에도 인간 내면에서 계속하여 끊임없이 솟아나는
새로운 사랑에의 열망과 성적인 갈망들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이런 갈망들은 외로움, 우룰, 고독, 허무감 등으로 나타난다.
삶에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일부일처제의 오랜 전통 속에서
우리는 윤리와 도덕과 종교심과 율법과 규율을 더 엄격하게 강화해 왔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 인간의 외도는 조금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앞으로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외도는 계속될 것임은 확실하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남자는 외도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 김정일은 네번째 부인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합법적으로 네번째 외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남자라도 그런 무한한 권력이 주어진다면
이제 김빠져 거추장스럽기만 한 사랑을 버리고
쉽게 새롭게 가슴 떨리는 긴장된 사랑을 택할 것이다.
전부인이나 전처 아이들도 별로 기분 나쁠거 같지는 않다.
이혼해도 생활에 전혀 걱정이 없다면
전부인 역시 그까짓 김빠진 남편 더 이상 필요치 않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 일반인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반인의 이혼은 쌍방 모두에게 엄청난 불이익을 준다.
그래서 차라리 김빠진 사랑이라도 그나마 붙들고 있는게 낫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미 서로 황홀한 도취 상태로부터 깨어난 많은 부부들이
<새로운 사랑에의 갈망>과 <자신들의 생활 공간이자 상호 의존적인 가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신음하고 있다.
과거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는 현실이 사랑 보다 중요했겠지만
(그 당시에 외도는 여유있는 상류층들이 다 독차지했지만)
요즘처럼 점점 더 여유롭고 풍족한 중산층이 많아지는 시대에는
갈수록 새로운 사랑에의 갈망도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래서 요즘 이혼율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보다시피 이혼은 서로가 현실에서 큰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현실의 안정된 가정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가슴 떨리는 긴장된 사랑이 가능하다면
현대의 많은 이들이 이것을 꿈꾸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 시대에 오래 결혼 생활을 한 여성분들 치고
남편이 아닌 외간 남자와의 가슴 떨리는 긴장된 섹스에 대해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분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남편의 바람으로 배신의 고통을 겪는 여성분들까지도
‘그까짓 바람 나도 얼마든지 피울 수 있어!’라고 외칠 정도니까.
‘단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안하는 것 뿐이야’ 라고 한다.
이런 외침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외간 남자와의 섹스에 대한 호기심과
성적인 갈망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현실이든 새로운 사랑이든 무엇을 선택할 지는
오로지 본인의 바람기와 주변 환경과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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