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바다

와인매니아1 2002. 11. 15. 07:12




말간 숲 사이를 헤집고 새벽여명이 얼굴을 내민다.
다가오면서 힘이 들었는지 잠시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머물기도
한 것 같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이 새벽이, 나만의 공간에
머무는 것 같아 더 없이 황홀하기도 하다. 그 황홀감은 어제 본
바다의 고저녘한 풍경을 더 선명하게 그리게 만든다.

바다 한 모서리를 늠름하게 지키고 있는 빽빽한 초록 숲이
이제는 제법 갈색으로, 가볍게 볼텃치 한 것처럼 은은히 물들이고
있었다. 푸른 바다의 파도마저 갈색 숲의 속삭임에 동요를 받은 탓
인지 함께 어울리고 싶다고 불규칙의 합창을 해대고 있다. 그리고
쓸쓸함이 묻은 바다에는 주인 잃은 돛단배만이 댕그렇게 남아 깊어
가는 가을의 운치를 더해준다, 그것이 내 희미한 시선을 옭아맨다.
이리저리 뒹굴어 다니는 지난날의 잔해들은 더 할수 없이 평화롭고,
그 무질서조차 자연스러워 예전부터 자기 자리 인 양 도란거리는
모습 또한 푸근하다. 바다를 연상하면 푸근함을 떠올리듯...

희뿌연 안개가 마치 산이 산을 업고 있는 것처럼 산등성이를 에워
싸고 있다. 하얗게 치장한 풍경이 마치 신선세계를 보는 것 같다.
맨 앞에 폼을 잡고 있는 산(山)이 나를 향해 손짓하며 웃음을 보
내고 있기에 철부지 아이들을 대신 보내 보았다. 쫙 펼쳐진 모래
사장에는 이미 산과 바다의 달콤한 유혹을 받은, 삐삐머리에 치마
자락 팔랑거리는 한 어린 공주와 또 다른 왕자가 밀려오는 파도랑
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었다. 개구쟁이 우리 아이들도 지켜보고는
이에 질세라 달리기에 합류해 본다, 피해 볼 사이없이 다가오는
물살의 애무에 그만 포박당하고 만다. 어쩜 발길이 뜸한 철지난
바다는 아이와 장난이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천진한
아이는 그 파도의 환대에 빠져도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것이리라.

솔솔 향기 피우며 다가오는 바닷바람에 우리는 익숙해졌나보다, 차
가운 기운이 내 옷 속까지 와 닿는데, 그것마저 아이에겐 가볍게 감
지되었는지 여전히 깔깔거림만이 내 귀와 눈에 빼곡이 들어온다.
그대로 구경하는 나조차 기분이 넉넉해지고 있었다.
여름이면 의례 모래장난을 제법 했건만, 아이들은 그저 바닷가의
모래만 보면 모래성을 만들고 또 장난기가 동하는지 덤덤하게 넘어
가지를 못한다. 보고 감상하는 것만이 아닌 직접 만지고, 느끼고 싶은
충동, 이런 충동이 빨려들듯 밀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때마침 작은 통통배에 사람이 조롱박이 매달려 있듯, 옹기종기 배크기
만큼 모여 앉아 한산한 항해중이다. 여유자적,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
는 새들처럼,물살을 가르며 내 앞을 지나가는 통통배는 내 마음의 한줌
찌꺼기마저 싹 쓸어가는 것 같다.
뒷짐지고 편안하게 펼쳐진 이 자연의 흐름을 보니 숨쉬며 살아있음에,
가슴 깊이 열정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심장을 느낄 수 있음에,

"사랑해 바다야 "
나의 오만과 독선도 죄다 수용하는 바다를 향해
"바다야! 너랑 사랑에 빠지고 싶어"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이런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아들녀석은 이왕 버린 옷,더 이상 조심할
것이 없다는 듯, 마치 지금 이시간만이 유일한 그들 시간 인 냥 룰루
랄라~~제 세상 만난 모양새다.

난 바다에 오면 언제나 넉넉한 바다의 품에 욕심을 드러낸다.
결 고운 모래 위에 발자취도 남겨보기도, 바다의 향기를 내 옷깃에
묻힌다. 그리고 숨쉬는 자연의 생명력을 허기진 가슴에 가득 채우며
야곰야곰 한 두 개씩 빼먹는 곳감같은 맛을 즐긴다.

대개 사람들은 바다에 오면 시인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 말에 의의를 달수 없는 것이 어줍짢은 나도 시인 흉내를 내는데,
앞 뒤 가리지 않고 놀기만 하던 철부지 우리 막내가 한 수 거든다,
"바다에 오니 편안해, 그래서 시 한 편 짓고 싶어"

나도 모르게 아이 말에 저절로 감탄이 나오려 했다. 가벼운 그 말은
점점 퇴화되어 가는 내 의식을 풍성하기에 충분했고 아울러 긍정적
사고에 촉촉한 감성까지 보태주었다.
언제나 하얗게 내려오는 새벽여명이지만 오늘따라 넉넉한 마음의 여
유로 근사한 하루가 될 것 같아 마음이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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