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각들

가을아침의 미소

와인매니아1 2005. 9. 14. 13:49

가을아침의 미소


여름이 과거 시간 속으로 묻혀지려는가.
이른 가을을 차려입고 가을을 기다리는 마네킹이 나를 내려본다.
쇼윈도의 옷들마다 한껏 베이지 색으로 치장하고 긴 소매자락의
실루엣을 보니 정녕 가을이 내 눈에 깊게 자리잡혔음을 실감한다.
게다가 진열된 체크무늬 바바리 코트랑 스카프의 운치를 보노라면
화사한 국화꽃이, 도로변 코스모스 하늘거림이 저 멀리서 나를 쳐
다 보는 착각에 빠진다. 밤샘하는 풀벌레 소리조차 진한 향수를 풍
기며 다가오는 가을은, 지독히 기세 부리던 여름의 진득함마저 슬며
시 거두어 버린다.

아침저녁으로 향기로운 샴푸 내음 같은 싱그러운 바람 향이 피부
곳곳 전해오고, 창문 열면 하이얀 솜털 같은 하늘풍경에 잠시 넋을
잃는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 더 이상 표현방법이 없다. 바
야흐로 생각 없이 마구 흘러 보낸 시간이 가지 못하게, 시계마다
건전지를 다 빼놓고 싶은 그런 마음의 그림들이다.

아직도 여름과의 마지막 이별식이 아쉬워 희디흰 속살이 다 보이는
반바지랑 민소매 옷차림을 한 젊음을 접한다. 금방이라도 붉은 알이
툭툭 떨어질 것 같은 석류알갱이처럼 젊음이 터질 것 만 같은 풋풋
함과 싱싱함에 압도되어 놀란 동공과 벌어진 입을 감당하지 못해 느낌
표만 머리에 맴돈다. 그리고 '어머나', '역시나.'......
내가 알고 있는 단어는 이것뿐인 냥 촌스럽게 굴게 된다

초가을의 전경 중에 가장 다정한 풍경은 아무래도 연인들의 자연스
러운 어깨 둘림의 포즈가 아닐까. 지루한 여름이, 이글거리는 태양 같
은 열기와 함께 서로간의 온도(?)로 인해 허리와 팔짱 끼기가 어려울
테지만, 한풀 꺾인 계절의 스산하고 싱그러운 바람 탓인가, 서로 안고
가는 모습이 한 폭의 멋진 유화그림처럼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다.
마치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의 영화의 제목처럼.......

거리 곳곳 가을의 서정을 드러낸다.
숍마다 일제히 생김새와 장식을 통일하자고 약속 한 듯이 갈대랑 드
라이 플라워는 필수로 자리하고 있다. 통일된 것이 더 인상적인지
차분한 분위기의 디스플레이는 사람 시선을 불어 모으기에 분주하다.
그 틈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름의 화려한 흔적이 한쪽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여름 제품 정리" 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오가는
나그네의 시선을 잡으려 안간힘을 써댄다. 참으로 인간의 이중적 마
음을 확인하는 건 여름 내내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 여름의 정열적
조각이 이제는 소용가치가 떨어진 가전제품 마냥 아무데나 방치되어
도 더 이상 미련 갖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불과 얼마 전
만까지도 자기의 운명(?)이 별로 손색이 없는 전시품으로 누군가의
선택을 기대할 만큼 희망을 품었을 텐데.........

언제나 계절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한번씩 뒤를 돌아보게 된다.
지난 시간들....과거로 묻혀져간 한 여름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지나온 삶의 테이프를 파노라마 펼쳐 보듯이 그때를 추억하는 재
생 스위치를 눌러보곤 한다. 비록 근사하게 채색되지 못할망정 아
름답게 기억해보려고 어쩜 마지막 몸부림의 제스처인지도 모르지만.
회상(回想)을 곱씹으며 어줍잖은 반추의 기회를 가져보기도 한다.
퇴색한 기억 속에는 해마다 믿기 어려운 폭우에 대한 안타까운 사건
들이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들이 많았던 여름의
편린들이 적지 않게 밀려든다. 훈훈한 인정과 사랑이 많았음에도
워낙 큰 자연의 재난 앞에 삶의 의욕과 사랑이 눈감아 버렸던 여름이
아니었을까?

제철을 만난 유원지가 북적댔듯이 아직도 여름 잔해가 곳곳마다
북적이며 우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하지만 숨막히게 만든 여름
의 기세는 더 이상 일상에서 사라진 것 같다. 이제 가을 문턱을 넘어
섰고 머지 않아 금방 또 가을의 자취를 그리워 할 만큼 이 계절이 머
무는 속도는 느낌을 앞질러 갈 것이다. 또 예외 없이 다가오는 자연의
순환 앞에 한랭한 고기압이 수런거리는 겨울을 역시나 겸허하게 맞을
것이리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대자연의 질서처럼 반복이요 되풀
이라 새삼 신비감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똑같은 되
풀이를 통해 반성하고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그나마 심심한 시간들을
기다리고 견디고 있는 건 아니겠나 싶다.

맑고 푸른 물빛하늘이 함께 눈인사하는 아침.
너무나 맑고 푸르러 이 아름다움을 표현할 단어가 없을 정도로 맑다.
이제 막 걸음마 띈 이 가을. 벼의 낱알이 꽉 찬 것처럼 그렇게 實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기상천외한 시리즈에 무공해웃음도
아끼지 않는 여유도 부려보면서, 선남선녀의 껴안고 다니는 모습도
예쁜 눈으로 봐 주는 따스함이 생긴다면 이 가을이 넉넉해 질 것 같다.

이 가을아침 조용히 나만이 아는 행복한 미소를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