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자기 말을 이해해줄 知己는 얼마나 될까.
길지도 영원하지도 않는 인생 길에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친구가 옆에 있다면 참 행복하다. 흔히 부부를 평생의 知己, 혹은
동반자라 부른다. 언제나 곁에 있어 서로의 소중함을 망각하지만
그래도 어려움에 직면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 내 버팀목이 되어
줄 사람은 역시 평생지기인 부부가 아닐까싶다. 가끔 일상의 때를
공유하다보면 주고받는 대화도 한정되고, 가슴 설렘도 증발되어
어제와 변함없는 오늘로 꾸려나감에 때론 재미없어 한다. 하지만
결혼이 재미만으로 살지 않듯이 믿음과 책임이 빛을 더해 나름대로
무게 실린 정으로 살게 된다.
12년 전,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흰 백마 탄 왕자를 기다렸다. 꿈많은 여고
시절도 아니면서 서정적 낭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에 망
토 휘날리는 그런 왕자를 거북이 목 빼듯 기다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백마는 타지 않았지만 왕자사촌
쯤 되는 키 크고 인물과 웃음이 넉넉한 남자가 나타나 주었다. 지
금도 그렇지만 모름지기 남자는 여성보다 열정과 끈기가 있어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내 앞에 등장한 남자는 진짜 인내와
열정의 진수를 보여 준 것이다. 그 당시 난 자신을 사랑해줄 그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다행히 그 남자의 매너가 평소 영
화에서 눈 여겨 봐둔 그런 행동으로 나의 시선을 끌었고, 데이트
마다 깔끔하게, 더 할수 없이 자상하게 다가왔다.
처음 시작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내 시간의 공백과 이용(?)
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남녀관계라는 것
이 자주 부딪히면 정들게 마련이고, 일관성 있게 챙겨주는 그의
자상한 태도는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한 그 상황에 딱 맞물렸다.
그리고 심각한 그의 고백 앞에서 장난만 고수하기엔 내 나이가
제법 익었다는 것을 느꼈다. 막내로 자란 탓에 내 장난끼도 보통
은 넘었는데, 그 때 남편은 내 고집과 골탕을 넉넉하게 받아 주었
던 것 같다. 미래의 내 남편이 될 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속을 덜
썩혔을 덴데 하는 미안함은 있다. 하지만 순탄한 길보다 빙 둘러
가는 길이 다소 시간 걸리지만 주위 경치도 감상하고 대화 나눌
꺼리도 있기에 그 또한 아름다운 회상꺼리가 아니던가.
지금은 값싸고 수입의 홍수에 열대과일의 귀함이 없어졌지만. 그
당시 10여년 전은 수입 바나나가 엄청 비쌌던 시절이었다. 날마다
데이트하고 귀가 할 무렵이면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주렁주렁
매달린 바나나 한 묶음을 늘 안겨 주었다. 하루 밤에 그 양을 처
분하기 힘든 나로서 주위 이웃에게 선심을 썼다. 그것도 모르는
남편은 단지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란 이유로 짜증한번 내지 않고
늘 챙겨준 괜찮은 성품 이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비싼 것
을 사주는 돈이 왜 아깝지 않았을까. 나중에 엄청 따가웠노라고
실토할 때는 나도 따갑긴 했다. 대부분 남에게 선심 썼기 때문에.
아마 그래서 결혼하기 위해선 산 넘고 물 건너라는 험난하고, 무
수한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을까. 나의 하찮은 경우로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진지하면 웃어 넘기고 애간장 끓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 우린
결혼이란 관문에 다다랐다.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없이
그저 데이트처럼 늘 재미있고 신나는 줄 알았던 철부지인 내가....
매일 눈 마주하며 왕자와 공주로 멋지게 자리 매김 할 줄 알았고,
떨어져 있는 시간 줄이면 그만큼 달콤한 꿀을 더 많이 양산하리라
상상했다. 마침내 행복만이 존재하리라 믿은 결혼 문을 통과했다.
결혼생활이 처음 느낌 그대로 유지되면 참으로 할만하다. 하지만
살아온 방식이 다르듯이 서로의 다른 색깔이 들어나고 미처 심각
하게 여기지 않은 것조차 접목이 되지 않자 도대체 내가 왜 결혼
을 했나의 물음표로 장시간 고뇌하기도 했다.
경험자들은 아시겠지만 '잡은 고기에 미끼 주는 것 봤냐.' 이건
낚시원칙이 아닌 인간사에도 적용된다. 이 진리를 깨닫는데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겐 신통할 뿐이다. 누구나 결혼을
연습하지 않듯이 무실습의 결혼은 나의 상상을 파토 내게 했다.
끝없는 환상에, 늘 꿀에 절여 살리라던 핑크빛 감성은 급기야 상
상 속 현실과 다름에 깨어진 유리조각 처럼 하얗게 되어버렸다. 서
서히 펼쳐진 여건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내 삶은 상상
을 초월한, 엉뚱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진짜 어설픈 나는 시댁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하나도 계산에 넣지 않았다. 단지 좋아하는 사람과의 결합 쯤
으로 여긴 내 사고에 문제가 많음을 그때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자란 환경과 너무나 다른 시어른과 함께 한 생활은 진짜 물릴
수 있다면 물리고 싶을 만큼 공통된 분모가 없었다. 그 와중에 남
편만이 나의 쉼터요 보호막으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었다.
세월이 약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인정하기 싫은 주변 삶을 비로소
수용할 만큼 살림과 인간관계에 성숙해 진 것이다. 포기와 체념이
란 낯설은 단어도 어느 새 숙명처럼 내 것인냥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느 듯 강산이 바뀐 지금 서로 성향을 너무 잘 아는 우리부부,
특히 남편은 나의 철없는 행동에 잔소리 보담 이젠 그러려니 하며
이완된 생활로 묵인해준다. 갈수록 아이러니 한 것은 내가 연륜을
쌓은 만큼 철이 들어야 함에도 예나 지금이나 별 반 달라지지 않음
에 있다. 속내도 제법 썩히며 살았건만, 생속이 여전히 가슴을 지
배하는 것이다. 반면 원래 넉넉한 남편은 어느 순간 부처가 되었는
지 더 넓은 마음씀을 보인다. 그렇찮아도 작은 내 그릇이 남편 앞
에서 더 작아진다. 남편의 일관된 부부철학은 '내가 좀 수고하면
아내가 그 만큼 편하지 않을까' 를 지금까지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마인드 때문에 매사에 꼼꼼하고 완벽하게 하는 행
동으로 나를 버겹게 하는 부분이 스르륵 눈 녹듯 사라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젠 옛날 공주와 왕자로 살겠다는 꿈은 일상과 시대흐름의 변화
로 그저 보통 백성으로 간주하며 산다. 왕자로 착각하고 날 공주로
대접하지 않으면 공주병이 도져 서로가 힘듦을 알기 때문이다. 그
병엔 특효약도 없고, 또 집안의 평화를 위해 어렵지만 우리 신분
을 격하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상황을 바꾸기 보담 내 생각
을 바꾸는 현명함도 세월이 가져다 준 부가가치이다. 궁하면 통한
다는 말처럼 필요에 의해 현명함이 절로 생기는 모양이다.
우리 주변의 부부를 보면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운전하는
사람들의 무표정과 대화의 부재(不在)시 그 커플을 부부라 간주하
면 100% 정답이다. 사실 늘 접하면서 미주알 고주알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는 게 현 부부의 실상이다. 나들이와 식사, 그리고 쇼핑
할 때, 대화가 필요한 부분에도 그렇지 못한 광경에 나 역시 그래
야만 할까 문득 회의가 인다. 그래서 난 오히려 밖에 나가면 개구
장이처럼 장난도 치고 많은 말을 끌어내기 위해 서울말도 아닌 요
상한 말도 구사한다. 남편 입장에서 듣기 거북할 정도로 아주 애
교 넘치게 혹은 섹시걸처럼 요모조모 신경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이 남자는 뭘 믿고 날 싱
싱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때론 긴장과 삶에 탄력을 주기 위해 쇼크요법도 간간이 쓴다. 모
임에서 밤늦게까지 놀고 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 때인데 놀다와
라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이런 노래
로 응수하는 아내가 때론 기가 막히는지 전혀 무신경 눈치 같다.
하지만 밤에 마트에 쇼핑 갈 때 남편이 따라 나선다던지 필히 큰
녀석을 대동시키곤 한다. 누가 엄마 납치하면 어떡하느냐는 구실을
붙여...이런 것 보면 나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틀림없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 나보다 밥공기를 추가한 사람답다.
이렇듯 부부란 믿으면서 뛰어봤자 내 손바닥이라고 여기면서 사나
보다. 해질 무렵 붉게 물든 저녁놀같은 情으로, 신선한 자극보다
끈끈한 보이지 않는 정으로 말이다. 요즘도 아침에 눈뜸과 동시에
아내보다 티비 리모콘을 찾는 남편의 야속한 행동이 마땅찮지만 그
래도 어쩌랴! 감성이 달라 가슴에 푸른 멍자국이 나더라도 10여년
이란 짧지 않는 케케묵은 정(情)으로 사는 게 부부인 것을......

'삶의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이트크럽 (0) | 2001.09.04 |
---|---|
여보, 고마워 (0) | 2001.09.04 |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 (0) | 2001.09.03 |
같은 이름의 두 여인 (0) | 2001.09.03 |
완벽한 남자 (0) | 2001.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