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도 '이상 문학상'의 대상인 '아내의 상자'는 요사이 발표한 작품
마다 꾸준히 세간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는 은희경씨의 작품이다.
폐쇄적 닫힘의 표상인 '상자'가 주는 뉘앙스......,
그 상자에는 아내의 지난 시간이, 그녀를 스쳐간 상처가, 자질구레한
물건만이 아닌 아내의 일상생각과 흔적을 느끼는 조각이 있었다.
이 작품의 원제목은 "불임파리" 였는데, 작품 전체의 인상을 미리 규정
해 버릴 수 있다는 판단아래 다시 "아내의 상자"로 바뀌게 된 일화가
있다. 이 소설은 불임 여성의 이상 성격을 통해 일상의 삶 속에서
소멸되어 가는 인간의 존재의식을 파헤치고 있다고 하겠다.
지극히 평범한 남편과 아내, 예전 수돗물 소리의 환청을 일으키며 입시
강박증 증세를 앓았던 적이 있는 아내다. 가정에 충실한 아내가 엮어
내는 삶 속에 신도시의 획일적인 살풍경 한 모습, 평온한 껍질 속의
황량한 표정들, 무미건조하다 못해 삭막하고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외로움 등등.......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들려는
현대인의 심리와 갈등을 조금은 신선하게 표현하고 있다.
결혼 5년이 된 이들 부부의 생활은 자기들의 판단과 외견상 남들이
볼 때도 '평온한 나날' 이란 표현대로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안정된
날들의 연속이었다. 단 첫아이를 삼 개월만에 유산한 후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아 한동안 유명한 불임클리닉의 신세를 진 것 외에는......,
해서 남편은 변화와 삭막하지 않은 생활을 기대하면서 신도시로 이사를
한다. 여기서 새로 이사온 이웃집 여자를 알게 되면서 가정밖에 모르는
아내는 가정을 벗어나 외출이 잦아지고, 급기야는 일탈을 감행하게 된다.
한번도 늦게 온 적이 없는 아내의 일탈 현장을 우연찮게 목격하게 된
남편은 그 동안 자기의 사랑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하며 요양소 같은
곳으로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이 묻은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마지막으로 아내의 방에 들어가 본다.
방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아내의 상자와 그 속에 자잘한 아내의
때묻은 비품들, 그리고 나날이 소모되어 가고 있던 노란 연필을 보면서
이제껏 자기가 알고 있던 아내의 일상을 회고 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는 독백처럼 아내의 배신에 분노하며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는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했다. 그것을 아내는 어떻게 갚아 주었던가
그녀는 지금 자고 있을 것이다. 약 먹을 시간에 깨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하는 일이라곤 오직 나를 기다리는 일 뿐일 것이다.
그녀는 내 동의 없이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을테고, 내가 찾아
와 주길 기다리는 일로 내 사랑에 보답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 작품은 남편의 판단과 생각만을 끊임없이 기술한다. 아울러 남편과
아내란 고리를 벗어나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의 개인이 다수의
무리들로부터 배척 당하고 나중에는 사회에서 격리되는 현실을 짧게나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시간이 깊어질수록 아내가 어딘 가로 가버렸다
는 사실에 아내를 찾을 전화번호 하나 갖고 있지 않는 점이다. 이 점에
남편은 큰 당혹감을 느꼈다고 나온다. 만약 우리 집의 경우 사전 연락없이
내가 늦게까지 자리를 비우거나 아님 외박을 해도 나의 행방을 찾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것이다.
나 역시 꼼꼼하게 수첩에 아는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놓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내가 만약 행방을 감추었을 경우 나를 찾는 방법이 과연
가능할까......, 갑자기 생각해 보지 않던 이런 의문이 일어났다.
우리가 남편의 행동반경을 알고 있는 만큼 아내의 흔적을 어느 만큼
파악하고 있을까? 요즘 필수품처럼 갖고 있는 휴대폰이란 기기로?
우리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한 조각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生이 다하는 순간까지 전부를 알지 못하며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하지 않을까......,이런 쓸쓸한 생각이 밀려온다.
작가의 말대로 "안다는 것은 어차피 잘못 안다는 뜻" 이라거나,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는 것" 이라
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느껴본다.
무엇에 의미를 두고 있는지, 늘 바쁘다는 소리만 내지르며 딱딱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규격에 맞춤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
그 와중에 아내들은 그 규격화되고 텅 빈 일상적인 삶에 의미들을 채워
넣고 싶어 자기만의 상자를 만들고, 오래된 흉터를 쓰다듬듯 그 상자를
어루만지며 안타까운 상처들을 빼곡이 담아놓고 있는 것을, 오늘날의
남편들은 이런 현실을, 이 삭막한 현실을 과연 알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운명의 상자를 하나씩 지니게 마련이다
그 안에는 누구나 흉내내기 어려운 온갖 생의 불가피한 모순들이,
고통과 쾌감,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가 숨어 있기에 함부로 그
상자를 열기가 쉽지 않으리라. 그 상자를 열면 삶의 굴레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덮쳐 오는 것을 두려워 하기에, 마치 나뭇잎 뒷면에 몸을
둥글게 말고 숨어 있는 공벌레처럼 자꾸 안으로만 감추고 싶은 마음
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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