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그 자체

잊혀진다는 것.......

에스쁘레소 2001. 10. 21. 11:29

금가루를 확 뿌려놓은 듯 노랗게 반짝이는 포철 야경을 바라보며
"잊혀짐" 에 대한 생각이 내 관념의 뿌리를 흔든다. 한 동안 잊고
지낸 올드 팝을 틀어놓고, 비릿한 바다 내음 풍기며 다가온 파도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추억이랄까 어떤 기억을 붙잡아본다.
눈에 잠시 넣은 이런 풍경도 다시 건조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면
망각(忘却)의 그늘아래 얼마 후 씻은 듯 말끔히 잊혀지겠지.

잊혀진다는 것......,
그 누군가로부터 잊혀진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득할 것 같다.
어쩜 우리가 엮는 삶 자체는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기쁨과 슬픔이
반복되는 가운데, 마치 달리는 기차 차창의 잊혀진 풍경일지도 모른다.
북적대며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그만큼 희비쌍곡선이 그어지는 역(驛).
역을 이용하는 수많은 이의 살아있는 표정과 삶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또
삼바와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서 만든 영화 "중앙 역"을 잠시 둘러보자 .

98년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답게 인간본질과 내면에 흐르는 따뜻함으로
인해 여러 단상에 빠지게 만든 로드 무비를 한번 언급하고 싶어진다.
흔치 않는 문명인이자 지식층인 '도라'는 중앙 역에서 글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대필을 해주며 생활 꾸려 가는 전직 교사 출신의 늙은 노처녀다.
가엾은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들을 한번도 부쳐주지 않은 채 자신의 유일한
친구와 재미 삼아 읽고, 마음대로 평가하고, 그리고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뒤틀린 상처와 악덕을 저지르는 교활한 여성이기도 하다.

어느 날 자신에게 편지를 부탁한 부인이 8살 난 아들과 길을 건너다 교통
사고로 죽자 꼬마 죠수아가 고아가 된 것을 알고 입양기관이라고 하지만
아이를 죽여 장기(臟器)를 팔아먹는 그런 곳에 돈 받고 넘긴다. 양심과 죄
책감의 소용돌이에 잠 못 이루며 다음날 뒷일은 생각 않고 아이를 탈출시키
고 먼 곳에 있는 그 아이 아버지에게 직접 데려다 주기로 작정한다. 함께
여행길에 오르면서 애초에 가졌던 미움과 불신, 거리감은 점차 멀어지고
딱딱한 껍질 속에 쌓여 지냈던 주인공 역시 잊어버렸던 감정들을 다시 되
찾게 되는 경험을 한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트럭 운전수에게 느낀 노처녀의 어설픈 감정.....,.
"길에서 만난 사람은 반드시 길에서 헤어진다" 는 운전수가 남긴 말처럼
운전수는 그녀와 조슈아를 남기고 떠나버리자 감정을 드러내는데 서투른
그녀도 마침내 눈물을 터뜨리며 가슴 아파하자 관람하는 나도 갑자기 먹
먹해진다. 그럴 수도, 단지 감정을 드러낼 기회가 없을 뿐이였구나.......,

지금껏 자기세계에 무관심과 타인에게 거짓말과 냉소적 웃음으로 굴절된
그런 삶을 살아온 자의 좌절이 차츰 진지한 사랑으로 변화된다. 나이 차이
가 나는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마침내 '인간'
으로서 서로를 마주보며 함께 힘든 여정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길과 함께 시작되는 로드무비가 그렇듯 미처 깨닫지 못한 생의 새로운
경험과 참된 삶을 발견하면서 주인공은 조금씩 마음의 벽을 허물기 시작
한다. 꼬마와의 여행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묻어둔 지뢰밭을 스스로 제거
해버린다. 아버지를 찾겠다는 희망이 번번이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뭔지 모를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둘이 함께 살면 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를 찾지 못해 떠나려는 이들 앞에 꼬마의 배다른 형이 나타
난다. 아버지의 옛친구였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편안히 대해준 두 명의
이복형은 형제라는 사실을 모른 채 꼬마와 즐겁게 축구를 하며 놀아준다.
이것을 보자 꼬마에게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 조용히 떠난다.
그와 연결 시켜준 편지를 남겨둔 채......,
어느 사이 사랑과 우정이 깊게 자리잡혀버린 두 사람. 떠나는 버스 안에서
골이 깊게 팬 주름살 사이로 흘러내리던 노처녀 도라의 눈물. 그리고 이제
껏 부치지 못한 편지만 써온 그녀가 부칠 편지를 쓴다.

"죠수아에게"
난 오랫동안 부치지 못할 편지만 써왔단다. 하지만 이 편진 꼭 부친다.
나중에 멋진 트럭 운전사가 되거든 날 기억해주렴. 나보다 형들과 있는 게
행복할 것 같구나, 날 기억하고 싶을 땐 우리들의 작은 사진을 꺼내보렴.
두렵지만, 너도 언젠 간 날 잊겠지?. 잊혀진다는 건 정말 두렵구나.

고통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미화시켜 버리는 여행길의 만남과 여행의 멋진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헤어져야만 할까? 가장 아름다움이
물들 때, 바로 그때 헤어져야 하다니. 슬픈 이별의 장(場), 뜨거운 해후의
장소로 각각 색깔 진하게 드러내는 역. 오랜 된 흑백영화 '애수'가 여러
번을 봐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듯 역(驛)을 소재로 하는 영화 대개가 뜨거운
그 무엇을 분출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나이와 주어진 상황으로 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긴 여행이 끝날 때쯤 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영화가 시사하는 점은 많다고 본다.

이 영화에서 꼬마는 실제 연기 경험이 없는 구두닦이 소년 출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악하고 자연스런 제스처를 완벽하게 연기해주었다.
늙은 노처녀 역을 기가 막히게 펼친 여주인공 역시 꾸미지않는 연기 덕에
열악한 것 같은 브라질 영화의 진수를 더욱 감칠맛 나게 만들어주었다.
이 영화는 아빠를 찾기 위해 먼 여행길을 오르는, 예전 만인을 울린 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한 걸음 뒤로 멀찌감치 서면
인간의 마음이 어떤 계기로 따뜻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불어넣어 줬다고 할까? 진정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존재로 기억될 때 삶은
더 윤기 있고 향기롭지 않을까 한다.

달콤한 추억을 부지런히 만들고 있는 바쁜 현대인.
어떤 행위든 분명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결코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일상의
각질화 된 질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의 현주소. 그 모습 속에 모난
구석으로 똘똘 뭉쳐진 나의 모습도 한편의 영화로 인해 인간의 본질적 따뜻
함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짚어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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