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그 자체

남자친구

와인매니아1 2001. 9. 19. 15:03

내겐 만만한 남자친구가 있다. 2년 전 우연히 초등 동창회를 통해 만난 
그 친구는 이제 누가 봐도 뱃살이 통통히 오른 중년 아저씨 모습을 하고
있다. 나의 유년시절을 보낸 안강이란 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나와 같은
포항에 삶의 터전을 내리고 있었던 탓에 다른 동창보다 그를 만나는 빈도
수가 많았다. 자주 만나 예전 향수도 채우고 까르르 웃게 만들었기에 그
를 '만만한 친구' 라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꿈들을 기억하며 또 어떤 꿈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면서 나
이를 먹어 간다. 나이 들수록 타인이 나의 거울이듯이 그 당시 동창들을
보면서 나를 한번 짚어본다. 그러고보면 동창들을 처음 접했을 때 당혹스
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절여진 푸성귀 마냥 그렇게
시들어진 모습에 참으로 의아했다. 촌스러움에 혹은 너무 아버지 같은 타
입에, 또 세파에 치열하게 지탱해온 그네들 말투와 모습에 그리고 나이를
초월한 해맑은 풋풋함에 온갖 희비와 감회가 엇갈렸던 것이다. 그 동안 내
가 먹은 나이는 잊은 채 타인들만 세월의 덮께를 껴입었다고 짐작했는가,
전혀 상상 밖의 모습에 솔직히 내 눈이 어리둥절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월을 빗겨간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정말이지 대다수들은 무슨 경로당
잔치 분위기에 익숙한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시골이라는 테두리가 여전히
개척하지 않는 면을 남겨둔 모양은 아닐지. 만나지 않았을 때 막연히 품은
내 설렘을 그들은 단칼에 싹둑 잘라 버리기에 충분했고, 모두 아저씨 아줌
마에 익숙한 행동거지에 난 기름과 물처럼 그들로부터 벗어 나려했다. 그
런 와중에 그 남자친구는 눈치껏 나를 챙겨 주었고 또 같은 곳에 산다는
점 때문에 그에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몇 십년 만에 동창회
를 치른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어른께 문안인사 올리듯 매일 내게 전화를
넣어주었다. 별 다른 메시지도 아닌 그냥 밥 먹었나 소리만 줄기차게 해대
는 것이다. 다른 레퍼토리도 있을 법 한데 한결같이 밥 타령하는 그에게
"넌 내가 밥도 못 먹고사는 사람처럼 보이니"

그는 내 물음에 마땅한 변명꺼리가 없는 사람처럼 그저 사람 좋은 웃음
으로 넘기고 그 후로도 밥타령은 변함 없이 이어졌다. 가끔 친구들과 술
한잔하자는 소리, 근사한 곳에서 식사하자는 소리도 여러 번 하곤 했다. 사
실 사회모임과 달리 그들과 한때를 공유한 추억 때문인지 만나면 참 재미
있었다. 촌스런 말투, 가시나(계집애) 종내기(머슴아) 이런 구수한 사투리
로 옛 향수를 불어 모았고 또 잊고 지낸 각각의 에피소드도 끄집어 한껏
유쾌한 시간을 만들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들이 만나자고 하면 난 기분 좋
게 달려갔고 비록 남자일지언정 동창과 어울리는 것쯤으로 여겨 그가 제공
하는 자리에 몇 번 참석하기도 했다. 그냥 잘 어울려주는 내가 편한 모양
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뿐 그 남자친구가 내게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으리
란 계산은 전혀 넣지 않았다. 몇 십년 만에 만난 반가움으로 자주 안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싶어하겠거니 단순히 여긴 나는 남편에게 이런 소리를
하게 되었다 "여보, 동창녀석이 밥 먹었냐하며 내게 전화 자주 한다."
별 실없는 사람 다 있구나 하며 남편은 나의 말을 건성으로 넘겨 버렸다.

원래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악한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술과
음악, 친구를 좋아하는 그는 사람심리를 잘 캐치해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
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전직에 어울리게 통 큰 남자로서 굵게
기분을 낼 줄 아는 매너를 보인 친구는 여자사이에도 제법 편한 친구라 인
식하기에 이르렀다. 나쁜 평보다 후한 평이 도는 점도, 어쩌다 자상하게 베
푸는 호의 때문에 그와의 전화가 한 동안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준비
없이 받은 한밤중의 전화는 나를 적지 않게 당황시켰다. 술의 힘을 빌어
소위 무슨 고백 비슷한 것을 토하는 것이 수상쩍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
히 천부당 만부당, 언감생심 감히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웃기는 짬봉이라
그를 폄하시키고, 급기야 무지막지하게 전화를 토막내 버렸다.

그동안 그가 내게 보여준 태도로 짐작컨대 나에게 나쁜 감정은 아니구나
정도는 예측했지만, 막상 친구의 속내를 듣고 보니 이제 편하게 전화를 받
아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제
더 이상 전화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명색이 자기를 좋아한다는데 싫
어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호감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이상한 감
정을 전달받는 것과 그로 인해 친구사이에 행동의 제약이 따르는 것도 싫
고, 이상한 루머에 휩싸이는 것도 더군다나 싫었다. 반듯한 인물과 자상한
배려로 여성을 꽤나 울렸을 법 한 그와 연루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
었다. 한번씩 만날 때마다 어느 새 내 취향을 파악해 챙겨주거나 또 귀부
인처럼 대접해 주는 그가 나쁘진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감정과는
다르지 않는가.

'내가 너에게 부담을 주었구나' 그의 말처럼, 그의 말을 듣고 난 후부터
그는 내게 부담스런 존재로 부각되었다. 자존심에 손상을 입은 탓인지 그
후 그와의 교류는 뜸했지만 간헐적으로 전화는 이어졌다. 그가 그런 엉뚱
한 마음을 먹게 된 이면에는 내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음도 배제할 수 없
다. 어릴 때 친구라는 이유는 그들은 너무 편하게 대해 준 것이 화근이다.
빛 바랜 색처럼 그와의 풋풋한 색이 퇴색되고 싸늘한 시간을 갉아먹던 어
느 날, 친구사이에 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다고..기
분이 묘했다. 나와 무관한 사이일지라도 영하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에게 동정을 일게 만든다. 그리고 지난 시간 내게 기울인 정성과 시간이
낡은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지나간다. 꽤나 나에게 마음 써준 친구인데, 측
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선 듯 면회 가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여곡
절 끝에 죄 없음이 입증되어 그 친구는 4개월만에 풀려났다고 했다.

만날 사람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만난다고 했던가. 우연히 그를 친구
집에서 보게 되었다. 다시는 그와 교류하지 않으리라, 상대 하지 않겠노
라 했지만 막상 그 친구의 얼굴을 대하자, 그리고 술 한잔하자는 그의 제
의를 받자 냉정하게 잘라먹기엔 내가 그리 독하지 못한 것 같다. 그때 술
한잔이 빌미가 되어 그 동안 단절된 교류가 새로 엮어져 그와 난 지금 편
하게 교류를 하고 있다. 물론 예전처럼 자주 안부전화하고 그렇진 않지만.

얼마 전 저녁 무렵에 그가 술에 취해 전화 한 적이 있다. 요즘 하는 사업
이 부쩍 잘 되어 자주 접대자리를 만든다고 했다. 불행을 겪었던 나머지
그의 순탄한 사업이 다행인지라 횡설수설 토해내는 말을 가끔은 들어준다.
근데 지극히 남자답고 배짱도 두둑한 이 친구는 술만 들어가면 용기가 생
기는지 내게 하고픈 말을 그때야 한다. 평소에 하지 못한 말을 술 힘을 빌
어 하는 모양이다. 가끔 맨 정신으로 전화하자고 일방적으로 끊을라치면
내가 응해 줄 때까지 막무가내 전화를 넣는다. 그 날이 그랬다, 20통화쯤
왔나보다. 그 당시 누군가의 전화를 대기중인 상태라 전원을 끄지 못하고
있었다. 예의가 실종된 그에게 약 오른 나는 급기야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 이 쓰레기 보다 못한 녀석아, 쓰레기는 재활용하지만 넌 재활용도 못해"

화가 치민 나는 미친놈을 서두로 내가 알고 있는 온갖 욕설을 읊으며 전
화하지 마라 했지만 그는 무슨 오기인지 신호를 줄기차게 보냈다. 내 곁에
는 아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갑자기 흥분해 날뛰는 어미가 희한
한지 아이는 묻는다. '엄마 그 쓰레기 인간이 우리 집에 찾아 와 행패 부리
면 어떡해?' 할 수 없이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어미의 날카로운 심정을 납
득시켜야만 했다. 지금 술을 많이 마시고 엄마에게 전화한 사람은 친구인
데 그는 무례한 거야. 술은 적당히 마시면 인생을 즐겁게 만들지만, 많이
마시고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면 '쓰레기' 같은 험한 소리를 듣는 거야.
이해가 된 건지 술이 참 나쁘다고 아이는 인식한다. 그래 아들아, 엄마는
술 못 마시는 사람을 매력 없다고 싫어하지만 저렇게 엄청 마시는 사람은
더 취미 없고 벌레 보듯이 한단다.....

다음 날 일찍 그는 전화를 넣어 주었다. 사과의 전화인줄 알지만 난 무시
하며 이제 두 번 다시 내 이름과 전화를 네 기억 속에 지워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그 후 그 전화사건은 지난 페이지에
침잠해버렸다. 그러고 이틀 후 그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5가지 김치를 택배로 보냈다고 도착하면 먹어라는 것이다. 기가 막힌 나는
'내게 그 만큼 욕을 듣고도 부족한냐, 누가 네게 김치 처분해 달라고 부탁
한 모양이구나. 난 너의 쓰레기를 처분 할 용의가 없다' 이렇게 응수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나를 아주 작은 사람으로 만드는 말을 한다.
' 내가 잘못한 것을 안다. 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난 남자다.'
옹졸하게 여자에게 욕을 들었다 해서 함께 대응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것은 달게 받은 것이 자기 방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치 먹고 살쪄서 다
시 자기를 향해 퍼부어라는 것이 아닌가.

김치가 도착한 날, 처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넣었다. 심한 욕을 한 내 입
이 부끄럽기도, 공짜로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어 망설이다 전화를 했다.
그는 담담하게 받았지만 맛있게 먹고 다음에 또 보내주겠다고, 용기 갖고
전화한 나를 어색하지 않게 만든다. 작은 소리로 그래 잘 먹을게.....
며칠 전 내가 퍼붓은 욕설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잘 먹겠다는
소리만 흘러나온다. 그 날 식탁에 오른 여러 김치와 게장을 여차저차한 일
을 치른 후 남자친구가 보내주었다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쓰레기 소리 할
만하네, 우리 집은 김치 걱정 안 해도 되네' 우스개 삼아 그랬다.그러면서
나답지 않게 거친 소리를 한 건 잘못이라고 수양부족을 남편은 지적한다.

그리고 어제, 또 다시 그 남자친구가 나를 감동시킨 것이 있다. 나이드신
어머니가 백내장 수술로 입원을 하셨다. 가까이 있는 내가 할 수 없이 간
병인 노릇을 하고 있는 중에 그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병원이라는 말에
놀란 그는 어머니에게 꽃다발을 전하고 싶다했다. 솔직히 나이드신 노인네
가 꽃바구니를 좋아할 리가 없을 테니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는 보낸
것이다. 환자이름으로 보냈으면 쉬울 것을 내 이름으로 보내니 결국 배달
인은 두 번 걸음을 한 모양이다. 그 꽃바구니가 주는 효과는 다소 컸다.눈
수술이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지만 병실에서 유일하게 꽃바구니 받은 어
머니를 모두들 부러워한다. 비록 돈으로 받았음 더 환한 웃음을 지었겠지
만(늙으면 돈이 최고의 선물) 주위에서 한마디씩 인사를 하니 덩달아 얼굴
이 밝아지는 같다. 친구덕택에 내 어머니까지 기분이 환해 져 그 꽃바구니
가 내게도 여간 이쁘지 않다.

마음 같아선 고맙다 인사를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그 정도쯤 해 줄 수
있지 뭐 하는 넉살이 생긴다. 이 무슨 찜 믿고 이러는 줄 모르겠다. 본의
아니게 자꾸 친구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다. 그
렇다고 내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발적 행위인 것을 칭찬하
기도 그렇고 하여간 고마움을 외상 달아 놓고 있긴 하다. 술 먹고 전화한
다고, 다시는 상대 못할 위인이라 생각한 것도 어느 순간 눈 녹듯 녹아버
리는 걸 보면 역시 선물 앞에 인간은 간사해 지는 모양이다. 어느 날 또
다시 술 먹고 횡설수설 내게 넋두리 푸는 버릇이 도질지 모르지만 가끔 이
런 식의 감동을 주는 점 때문에 어쩌면 이 친구를 싹둑 자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이제 미운 정이 들었나 보다

'사랑에 빠지는 그 자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을 사랑하나봐  (0) 2001.11.30
잊혀진다는 것.......  (0) 2001.10.21
향수선물  (0) 2001.10.13
사랑하는 아들아.  (0) 2001.09.15
젊어 보이고 싶은 욕구  (0) 2001.09.06